[퇴사레터#2] 눈 떠 보니 상사의 메모장으로 빙의했다

2024.10.30 | 조회 114 |
2
|

퇴사레터 from 교토

[마감] 퇴사 후 떠난 교토에서, 매일 밤 쓴 퇴사레터를 보내드릴게요. (10/28~11/8)

오늘의 노란 오므라이스
오늘의 노란 오므라이스
우리는 오전에 교토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어요. 햇살이 적당하고 바람도 솔솔 불었습니다. 한 식당 창가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계셨습니다. 파란색 회오리 무늬 옷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멋쟁이 할아버지였어요. “2명 되나요?” 손가락 두개를 펴며 묻자, 주방에 가서 밥솥을 열어 보셨어요. 밥이 충분했는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하셨습니다. 밥은 맛있었어요. 투박한 노란색 달걀 오므라이스에 케찹이 잔뜩 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바로 금각사로 향했어요. 2층과 3층 벽면과 지붕에 빼곡히 금박이 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멀리서 봐도 반짝반짝 광이 나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금각보다 햇빛이 환하게 비친 노란 나뭇잎이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노란 오므라이스를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2024년 10월 30일 수요일 from 교토 니시진

 

 


[1년 차 사사의 레터]

🥵 절대로 그분을 화나게 해선 안 돼

 

우리는 퇴사의 이유를 각자 세 가지 꼽았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비슷하더군요. 바로 ‘상사’.

전 평범한 사람입니다. 일도, 글쓰기도, 심지어 대인관계도, 딱 평균. 남보다 더 잘하거나 못하지도 않는 평균치 인간이에요.

저와는 달리 제 상사 ‘방울’ 씨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침없이 일을 추진했고, 다른 팀과 협업도 훌륭하게 해냈죠. 하지만 문제는 하나. 가끔 팀원들을 벌레처럼 바라본다.

팀원들의 업무 평가가, 그날 방울 씨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한동안은 A 팀원을 혼내고, 또 한동안은 B 팀원을 미워했어요. 제 기분도 널 뛰었습니다. 잘못을 하면 사무실 모두가 알도록 팀원을 혼냈습니다. “이건 초등학생도 아는 거 아냐?” 하면서요.

‘절대 그분을 화나게 해선 안 돼!’

불행은 외부에서 옵니다. 어느 날 다른 팀 팀장이 방울 씨에게 한마디 했어요. “팀원들 너무 보채지 마세요.” 아뿔싸! 그날부터 방울 씨는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업무 계획을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업무 계획을 저희는 꼭 게시판에 올립니다) 5분쯤 지났을까요. 전화가 왔습니다. “기획안이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업무 계획을 그렇게 짰냐”라고요. 그러면서 덧붙였어요. “내가 하면 30분도 안 걸리겠는데. 일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30분 정도 지나자 메신저에 기획안이 올라왔어요. 이런 멘트와 함께요. “제가 딱 30분 투자해서 작성한 기획안입니다.”

‘이 자식을 보세요. 정말 무능하고 한심합니다. 저는 아니구요’

저는 이렇게 읽혔습니다. 일을 한 지 5개월 됐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를 이해하게 된 건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즈음입니다. 방울 씨는 다른 팀으로 간 지 2개월 정도 지난 후였죠. 전 일을 할수록 점점 멍청해졌어요. 과도한 멀티태스킹과 밤낮없는 업무.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고 하지 않던 실수를 했습니다. 남의 작은 실수에도 화가 나자, 생각했어요. 아, 나는 지금 나 같지 않다. 그 순간 퍼뜩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기는 싫지만

방울 씨도 그랬을 수 있겠다.

너무 많은 일에 치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거죠. 지금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그분도 그런…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가끔씩 나사가 빠져보이는 사람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닐 거예요. 모두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큰 소리가 나가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로 10년, 20년이 지나면 내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어느 날 닮아 있는 것이구요. 교토에 있으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그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10년 차 근면성실백수의 레터]

😇 대표님... 그 멀고 먼 이름

 

가장 1차원적으로 얘기하자면 저는 대표님의 연락을 그만 받고 싶어서 퇴사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저에게 매일 두세 번씩 전화를 걸어서 오늘은 뭘 해야 한다거나, 이런 걸 신경 써야 한다거나 하는 내용을 엄청 쏟아냈어요.

저는 메모장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말로 하면 저절로 입력되는 메모장이요.

에너지가 있었다면 조금 더 버티며 잘 맞출 수 있었을까요? 유연하게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첫 번째로 나와 대표님은 업무 방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대표님의 방식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든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예를 들어 모든 세밀한 것까지 모두 보고받고 싶어 한다는 것들이요. 저는 주체성이 있는 환경에서 효능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1부터 10까지의 내용을 공유하며 같이 논의하기를 원했어요. 제가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대표에게 내가 맞추는 것이 어쨌든 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합니다. 안 맞았기 때문에 저에게는 난이도가 더 높았을거라는 것을요.

두 번째는 일을 제대로 함께 하려면 깊은 신뢰를 쌓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얕은 신뢰는, 맡겨진 일을 그럭저럭 잘 해내기만 하면 쌓이겠죠. 하지만 깊은 신뢰가 쌓이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생각과 방향이 일치함을 오랜 시간 여러 번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동안은 물론 힘들고 인내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으면 서로 느끼기에 조금 더 ‘일을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사실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면 먼저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요. 하지만 그 신뢰가 그냥 시간이 지나면 쌓이거나 무조건 네네만 해서 쌓이는 것이 아닌, 물리적인 경험들이 오래 쌓여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게 되었습니다.

대표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직접 겪은 경험에 의한 깨달음은 저에게 더 진하게 남을 거라 생각해요.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온다면 이번에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겠죠…? 이 글의 씁쓸함을 생선 육수 라멘으로 달래볼게요. 내일도 밤에 만나요!

 


💌 다음 레터도 내일 밤 9시에 보낼게요.


 

👩‍💻 안녕하세요. 에디터 사사와 기획자 근성백입니다. 우리는 같은 날 퇴사했어요. 그리고 교토로 떠납니다. 퇴사레터는 ‘일이 곧 나’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만한 퇴사 이야기를 담아 보낼게요.

🙏 우리의 실시간 여정을 보고 싶거나, 문의하실 점이 있다면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주세요. 🔗 인스타그램 @ep.11.pj (클릭)

😎 이 레터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다면, 이 링크를 복사하여 공유해 주세요! maily.so/11project?mid=0751e7d6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퇴사레터 from 교토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종종

    1
    19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2024 퇴사레터 from 교토

[마감] 퇴사 후 떠난 교토에서, 매일 밤 쓴 퇴사레터를 보내드릴게요. (10/28~11/8)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