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 사사의 레터]
📱나는 아이폰이 싫다
퇴사의 이유 두 번째. 아이폰. 10년 차 아이폰 유저인 저는 아이폰이 싫습니다. 매끈한 티타늄 소재와 곡선은 항상 제 마음을 흔듭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기본적인 기능이 없어서 당황스럽기 그지없어요. 예를 들면 통화 녹음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 저는 멍청해졌어요. 하지 않던 실수까지 늘었어요. 에디터인 저는 내부 회의를 거친 뒤,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넣어 콘텐츠를 만들어요. 검수도 받습니다.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전 모든 회의를 녹음했어요. 필요할 때는 녹음본을 듣고, AI가 요약하는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업계에서 뛰어난 감각과 실력으로 성공한 전문가 J씨. 그는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30분마다 담배를 피고 오겠다며 모든 회의를 중단했어요. 콘텐츠 제작이 모두 끝나고 J씨에게 연락했습니다. 틀린 부분이 없나 확인을 해달라고요. 답변이 없었어요. 꼬박 하루가 지난 뒤 밤 9시에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그 자리에서 바로 피드백이 시작되었습니다.
통화는 30분 정도. 저는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지요. 그분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피드백을 반영하느라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갔습니다. 콘텐츠는 새벽에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8시부터 전화가 쏟아졌어요. J에게서요. 아차, 깜빡하고 가장 처음에 준 피드백 하나를 놓쳐버렸던 거였어요. “‘책상’이 아니라 ‘의자’다” 너무 사소해서 깜빡해 버린 것이지요.
책상이 아니라 의자다. 책상이 아니라 의자다.
J는 아침형 인간인가 봅니다. 어제 없던 피드백이 쏟아졌습니다. 어제 ‘재밌네요’ 했던 부분도 아침엔 모두 고치라고 했어요. 애초에 당신을 뽑은 회사가 썩어빠졌다는 이야기도 덧붙인 걸 보니, 정신이 또렷해졌나 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왜 어제 그 통화를 녹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 이 폭언을 그냥 흘려듣고 있는 걸까.
…아이폰이 너무 밉다!’
나는 아이폰을 미워합니다. 통화 녹음이 안 되거든요. 가끔 터무니없이 기본적인 기능이 없어서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별 수 있겠어요. 이미 익숙한 아이폰이니까요. 우리 회사에 익숙한 J씨에게 내가 맞춰야 하는 것처럼, 나도 아이폰에 맞춰야지요.
J씨를 어르고 달랬습니다. 미안하다고도 했어요.
회사와 J씨는 여전히 잘 지냅니다.
우습게도 저는 최근에 휴대폰을 바꿨습니다. 아이폰 X에서 아이폰 16 프로로요.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이폰을 미워하지만 다시 아이폰을 구매합니다. 제가 퇴사한 이유는 아이폰입니다. 절대 J씨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10년 차 근면성실백수의 레터]
😲 뭐 하는 분이세요?
제가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사람들이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근성백씨는?’ 이 직무에 이 연차가 입사를 한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저의 선배는 있었으나 딱 제 연차 정도의 중간 역할은 처음인 거예요. (그럼 인사담당자는 팀에다 나를 뭐라고 설명한 걸까요? ㅎ) 입사 후 가장 중요하고 빨리해야할 건 ‘역할 정의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역할을 정의해보자’고 회사에 요청하면 그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회사가 꽤 있어요. 특히 스타트업이라면 ‘일단 이 일을 빨리 쳐낼 신입’ 또는 ‘이 그지같은 상황을 해결해 줄 경력자’를 뽑는 경우가 많은데요. 보통 ‘해야 할 일’만 정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규 입사자가 입사해서 해야 할 첫 번째 업무가 되죠.
‘무슨 일 해야 하는지만 알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정의가 안 되어 있을수록 구체적으로 역할 정의를 해야 하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겠는지, 어느 수준으로 하면 되는지, 의사결정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조율해야 하는 팀은 어딘지 등. 여기서 입사자와 회사 간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많이들 삐걱거립니다. 물론 저는 위의 목록들이 정의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오 그런데 슬프게도 저는 입사하자마자 업무의 회오리에 휘말려 역할을 제대로 정의할 시간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명확히 정의된 것은 오직 회사에서 생각한 ‘해줬으면 하는 일’ 목록뿐이겠죠. 보통 이 리스트는 길고 모호해요. 제 의사는 반영 안 되어 있고요.
제가 이번에 정말 크게 깨달은 것은요. ‘연차가 쌓일수록, 내가 잘하는 일도 많아지지만, 내가 못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일도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내 적성에 안 맞고 노력해도 잘 안되는 일을 인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력하면 다 된다고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어요! 초반에 역할 정의를 하며 회사에서 필요한 역량 대비 내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빨리 논의를 해서 그 능력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저는 그게 늦었습니다.
퇴사하고 나니 제일 달라진 건, 누군가에게 주입 당한 역할과 해야 하는 일 목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면 당연히 역할과 해야 할 일은 생깁니다. 어차피 있어야 할 거라면 내가 주체적으로 역할과 할 일을 정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다음 레터도 내일 밤 9시에 보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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