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18] 우리는 공평하게 못났다

성격급한 썰매개의 집구하기 분투기

2021.09.26 | 조회 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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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미루고 미루다 개학 전 날 방학숙제를 몰아 하는 아이처럼, 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이리저리로 뛰며 집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누군가와 서로를 책임지는 사이가 될 수 있을거라고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 하나만을 위해서 즐겁게 살자고 다짐했었죠. 그러나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 서로의 삶이 더 풍성해지길 바라다보면 어쩐지 지금 손에 쥔 무언가가 조금 초라해 보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리저리로 바쁘게 움직이느라 조금 지쳐, 이번 주말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때와 꼭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처음 길을 나설 때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며 다시 한 번 제 마음을 다져보고자 합니다. 다시 길 위에 서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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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원체 느긋하고 세상사에 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애인과 4년째 만나고 있다. 애인의 이런 성격은 열받는 상황에서 항상 빛을 발하는데,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일도 항상 불을 뿜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겐 어떤 의미에서 그가 ‘안전핀’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면에서 좋은 ‘절대반지’ 같은 성격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느긋한 성격 덕분에 본인이 살 새 집을 구할 때도, 심지어 우리가 함께 살기로 한 동거 공간을 고를 때도 항상 나 혼자 속이 타들어가니 말이다.

 

2년 전 2월이었다. 애인은 같이 사는 친구와 살만한 새 집을 구한다면서 내게 새우젓 암굴이라 해도 믿을 만 한 사진들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정도면 뭐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그를 향해 나는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사람이 이런 데 살면 팔팔한 20대라도 시들시들 시들어 갈 것 같은데, 본인은 이제 40을 앞두고 있는데 명을 재촉하고 싶은건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대체 엥간히 느긋해야지, 이런 데 애인이 산다고 하는데 마음이 편할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마음의 소리로 대충 감춘 채, 내가 도와줄게(라고 쓰고 내가 할게) 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빛보다 빠른 실행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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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가 발벗고 나선 덕분에 애인은 지금의 집을 구했다. 물론 층간/층내 소음이 좀 골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집을 구했다는 자부심이 (내겐) 있었다. 미소와 사연을 팔아 중개사분께 사정해 싸게 구한 집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위치와 조건과 가격의 조화가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그리고 그곳에서의 2년과 함께 우리의 시간도 엉거주춤 흘렀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찌저찌 지금 집 계약이 끝나는 대로 함께 살 집을 구하기로 합의해버렸고, 그와 동시에 2년 만에 나는 다시 암굴이냐 햇살드는 집이냐를 고르는 오징어 게임에 강제참여(?)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번 집 구하기는 지난번과 급이 다른 일이라는 점이다. 큰 돈이 들어가는데다 서로의 돈도 섞여야 하고, 집의 유형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 미래의 크기도 달라져야 함이 분명했다. 그러다보니 변수가 한두개 뿐이었던 지난 번 애인의 집구하기와는 차원이 다른 스트레스가 내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으로 느긋하게~ 여유롭게~ 그분처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세상 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배운 내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나는 오만 스트레스를 혼자 다 받기 시작했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안전핀은 외려 도망가고 싶은 심경에 이른 것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해결 방법은 같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좀 더 세속적으로 썩어있고, 좀 더 소셜한 가면을 잘 쓸 수 있는 내가 주도권을 잡고 나가야 된다는 것. 착하고 순수한 애인을 앞세웠다간 사기를 맞거나 암굴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애인은 지난번처럼 나를 칭찬해 주면 될 테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지치는 내가 포기하지 않게 고기를 잘 먹이고 우쭈쭈 해주다 보면 어느새 집이 구해져 있겠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못난 점들을 잘 채워서 완벽하진 않아도 어찌저찌 둥근 모양의 가족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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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 싫은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는 것이다.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서로 못난 우리가 서로의 삶을 보완해 줄 수 있을지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서로가 달랐으면 하는 기대가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있다. 애인은 애인대로 자신의 생각을 절대로 굽힐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내가 베를린 장벽처럼 느껴질 테고, 나는 나대로 이번만큼은 좀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싶어 일부러 결정을 미루고 있다. 이대로는 파국임을 잘 알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다른 서로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태라고 해야할까? 이대로 서로의 삶을 합쳐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뒤섞인 채 말이다.

 

그래서 추석 내내 고민이 많았다. 이사 할 생각을 하는 것도, 짐을 정리하는 것도 다 귀찮아서 넷플릭스 막장 드라마를 서너편 몰아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럼에도 뭔가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풀고 싶어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이렇게 쭉- 써놓고 나니 조금은 실마리가 보이는 기분이다. 서로가 서로이기에 좋은 만큼, 그 사실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내가 완벽하지 않으니, 상대에게도 그 완벽을 바랄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공평하게 못난 서로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어야만 우리가 진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 공평하게 못났다. 다행이도 그 모난 구석들이 퍼즐처럼 잘 맞는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하루종일 한탄을 할까 고민하다, 이제 이 글을 마치면 부동산 투어에 나서려고 한다. 집도 동네도, 미리 봐둬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애인에게 나처럼 뭔가 알아보라고 강요하는 대신, 집을 다 보고 난 뒤 양고기를 사달라고 조를 생각이다. 그럼 하루치 힘듦이 양고기 연기와 함께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번에는 좀!! 대신, 이번에도 각자 잘 해보자고 생각할 것. 우리는 이제 동시에 출발해 속도를 겨루는 달리기 선수가 아니라, 함께 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 계주 팀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말이다. 부디 이번 집 구하기 미션에서도 썰매개인 나를 등에 업고 애인이 성공적으로 미션 완수를 할 수 있기를. 등대가 쉬면 오징어잡이 배가 조업을 할 수 없고, 오징어잡이 배가 없으면 등대도 빛을 잃을 테니까.

 

적당히 못난 당신을 만나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다시 이 험난한 길 위에 나선다.

 

길은, 어딘가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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