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25.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설득하려면 설득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2023.10.20 | 조회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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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요즘 저는 책방 창업을 준비하며 예비 책방지기로 저를 소개하곤 하는데요. 사실 이전의 저는 8년간 기업 홍보를 담당했었답니다. 스스로 능력과 자질이 의심돼 그만두고 싶었던 때도 많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덕분에 지금의 단단한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오늘은 조금 오래 된, 일을 잘하고 싶어 욕심내다 보니 생겼던 당시의 실수를, 그럼에도 애썼던 마음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나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아주 극심하게 클라이언트 담당자와 언쟁을 벌인 일이 있다. 감히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제정신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자칫 계약이 파기되거나 혹은 그 순간은 넘어가더라도 재계약이 안되면 어쩌려고 경솔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단 클라이언트와 싸움해봤자 득될 게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대행사의 경우 계약 연장이 안되는 것만큼 절망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아니라도 해도 결정권이 클라이언트의 손에 달린 이상,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라이언트의 모든 요구와 주장에 끌려다닐 수도 없고, 끌려다녀서도 안 된다. 갑을 관계로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는 내가 담당자이고, 전문가인 까닭이다. 

 

내가 전문가니까

2015년 5월 갈등도 그 때문에 발생했다. 당시 나는 내가 홍보에 일가견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홍보에 대한 '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홍보가 보도자료 쓰고 배포하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기사 될 만한 아이템 발굴을 잘했고, 무엇보다도 기자들에게 먹히는 보도자료가 무엇인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 담당자가 연차는 훨씬 높고, 그 산업군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은 많을지 몰라도 홍보는 내가 한 수 위라고 믿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그날도 단신 보도자료 컨펌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커버리지 수(보도자료 1건을 배포했을 때 게재되는 기사 건수)를 높이기 위해 '출시'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면, 이미 매장에 깔린 제품을 '출시'라고 내보내기는 어렵다는 게 클라이언트의 주장이었다. 담당자는 '출시' 대신 '소개' 또는 '제안'을 쓰자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면 정보성이라기보다는 완전히 광고성 기사처럼 보이기 때문에 역시나 기사화될 가능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출시'냐 '소개'냐를 매듭짓지 못한 채, 이번에는 보도자료 내용을 놓고 의견이 다시 갈렸다. 제품 소재에 관한 설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내 판단으로는 클라이언트 담당자의 방향으로 내용을 수정했다가는 주관적인 보도자료가 될 것 같았다. 때문에 이 부분 역시 수정하지 못하겠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

전화통을 붙잡고 한참을 옥신각신했고, 나도 담당자도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담당자를 설득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담당자도 담당자의 이유를 들어 수정을 요청했다. 그렇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담당자의 말을 잡아먹고, 담당자는 다시 내 말의 꼬리를 잡아 먹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다 나는 말을 하지 않은 상태로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담당자는 본인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아주 크게 화를 냈고, 나의 짧은 경력을 지적하며 당장 본인이 말한대로 수정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시간은 어느 새 저녁 6시를 넘겼고, 쉽게 컨펌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보도자료는 산산조각이 난 채 불 같은 화만 남기고 말았다.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내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데는 그 보도자료가 어찌되었든 내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무엇이든 말이 되는 자료여야 했다. 그런 자료들이 하나, 둘 쌓이고 신뢰도가 떨어지다 보면 결국 진짜 좋은 보도자료를 보내더라도 무시될 수 있기에 나는 좀 더 신경을 쓰고 싶을 뿐이었다. 담당자가 해달라는 수정이 어렵지 않은 것임에도 끝까지 의견을 고집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속이 상했지만 상한 채 퇴근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일도 일을 하고, 모레도 일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담당자와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까닭에. 결국 모두가 퇴근하고 텅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사과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의 미스가 있었던 부분에 송구한다, 브랜드 애정이 큰 만큼 좋은 방향으로 제안한다는 게 그만 불쾌감을 드린 것 같아 염려된다, PR 담당자로서 Best와 Worst를 판단하고 사전에 말씀을 드리는 게 바로 제 역할이기 때문에 이 점을 강하게 어필하다 보니, 표현과 태도가 부적절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등등

그렇게 한참을 이 단어, 저 단어를 넣어보며 수정하다가 메일을 보내고 부랴부랴 늦은 퇴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 그런 일이 있고도 우리는 다시 일을 했다. 아무일이 없진 않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듯. 

그날 이후 나는 그 전화 통화의 내용을 수십 번 복기해봤다. 잘못은 내게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전문가라는 이유로, 담당자를 알게 모르게 무시했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설사 담당자의 말이 틀리더라도 일단 차근차근 듣고 방법을 생각해봤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 주장이 가장 강력하고도 시급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담당자의 말을 중간중간 잡아먹었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밀고 가야한다는 생각만으로는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우를 범했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커뮤니케이션한다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실패한다면 일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홍보라는 게 머리로도 하고, 엉덩이로도 하는 일(의자에 앉아 고민하면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지만 결국은 '사람'이 전부인 일이기 때문이다. 

해결책 또는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면 일방적인 원 메시지(One Message)보다는 적어도 고를 수 있도록 선택지를 주는 게 맞고, 그럼에도 설득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일단 상대방의 방향대로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실패하면 그 다음에는 의견을 달라고 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당장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기세로 덤벼들 필요도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넓혀가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2014년,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나는 같은 클라이언트를 맡을 수 있었다. (물론 클라이언트와의 인연은 대행사를 퇴사하는 2020년까지 이어졌다.) 운이 좋았던 것도 맞고, 나 또한 운이 달아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해가 바뀌고 첫 보도자료를 준비하던 때, 나는 조욜이 필요한 몇 가지를 정리해 메일을 보내고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통화 말미에 담당자가 "그렇게 하는 게 좋다면서요, OOO 생각은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지난 시간 동안 수차례 얘기했던 지점들에 대해 드디어 담당자가 인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비해 담당자가 많이 바뀌었음을 느끼며, 나를 파트너로 존중해준다는 것을 느끼며 일에, 그 알다가도 모를 커뮤니케이션에 흥미를 느꼈다. 

그때나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이나 여전히 순간순간 강력하게 내 주장을 피력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지만 무엇인가를 바꾸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너무 강력한 설득은 피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다. 아무리 맞아도 고집처럼 보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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