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자자족의 문장_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말기
책방 주인이 된다면 오가는 모든 손님들이 무조건 볼 수 있도록 꼭 써 두고 싶은 문구가 있습니다. 제겐 좌우명처럼 붙들고 다니는 말이기도 한데요.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발견한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말기”(작가의 말 제목)입니다.
이 문장을 처음 만난 건 2010년 무렵이었어요. 졸업한지 1~2년 지났으나 여전히 기자 ‘지망생’의 신분을 못 벗고 있었죠. 친구, 선후배들이 최종합격자가 되어 방송 화면에 나오거나 신문 지면에 실리면 반가우면서도 부러워 배가 아팠어요. 그들은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제자리인 제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고요. 자꾸만 숨어들고 싶었던 때,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을 읽게 됐어요.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운데, 인간은 참 우매해서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른다.”는 말에도 위로 받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작가의 말에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자기비하로 조각 난 마음을 다독이는데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큰 울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회사를 다니는 내내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데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포장하는데 더 큰 에너지를 소진하고요. 분명 제게도 저만의 능력이나 매력, 강점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부족하더라도 부족한대로 제가 저를 믿고 자신감 있게, 또 능청스레 일했더라면 이후의 결과가 달라졌을까 싶기도 한데요. 그때는 제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워하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 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작가의 말 중에서
이런 시행착오 끝에 다다른 저만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하찮고 평범해 보이더라도 그 안에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결코 하찮고 평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각자의 불을 잘 밝혀두고 꺼지지 않도록 돌보아야겠지요. 그러니까 구독자님도 ‘부끄러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고’ 스스로의 이야기에서 주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계속 그래볼게요.
🎈 부유하는 유부의 문장_나를 움직이게 하는 말 ‘하면 는다’
삼십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아마도 저는 김하나 작가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사실 북토크나 강연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스몰 토크를 한 적도 없고, 작가님이 운영하는 팟캐스트에 사연을 보낸 적도 없지만 팟캐스트 ‘책읽아웃’ 시절부터 지금의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까지 챙겨 들으며 또 사이 작가님의 출간한 책을 읽으며 생각에 공감하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은 변한 듯 한데요.
지금 보니 퇴사를 하기 일 년 전 쯤부터 출근 전 거의 매일 카페에 들러 10~20분 책을 읽고 사무실로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김하나 작가님의 <말하기를 말하기>였는데요, 그 때 만난 이 문장은 저를 조금은 적극적이고 내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줬습니다.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은 싫어하지만 ‘하면 는다’는 말은 좋아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일단 해보면 조금은 늘 것이다. 그리고 해봐야만 ‘아, 이 분야는 나랑 정말 안 맞는구나’하고 판단이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말하기를 말하기》김하나
여자가 몇 명 없던 과거 팀에서는 동성에 연차도 나이도 비슷한 한 분과 저를 비교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대놓고 같은 일을 시키고 ‘너는 이렇게 밖에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는데요.(지금 생각해도 참 별로네요 ㅎㅎ) 그런 환경에서 누군가와 늘 비교당하거나 스스로 비교하기 일쑤였고, 자책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나는 왜 저런 생각은 해내지 못했을까? 노력이 또는 능력이 부족한건가? 하고요. 물론 경쟁은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과도한 경쟁은 상대를 의식하게만 만들더라고요.
그랬던 제게 이 문장은 탁월한 뛰어남은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은 누군가의 뒷모습만 쫓으며 허탈해하기 보다는 좀 더 즐겁게 내 성장에 집중해보자고요. 그리고 스스로 일을 찾는 지금 이 문장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되뇌며 저를 움직이게 합니다. 곰자자족이 뉴스레터를 쓰자고 제안해주었을 때 다른 에디터들의 필력을 아는 상태이니 주저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면 는다’는 조금은 나이브한 자세로 수락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일들을 시도할 때도 이 정신은 조금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일단 해보고 재미있으면 계속해보지 뭐 하면서요.
물론 비교되는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매번 뉴스레터를 쓰면서 특히나 두 에디터와 함께 글을 쓰는 이런 기획에서는 부족한 필력과 독서력을 확인하곤 합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하면 는다’의 정신으로 오늘도 이 뉴스레터를 마감해봅니다.
😎 은둔자의 문장_땅끝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바다입니다
“(전략)…살기 위해서는 이제 /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 그걸 보려고 /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땅끝>, 나희덕
오늘 제가 고른 작업자의 문장은 나희덕 시인이 쓴 ‘땅끝’이란 시 중에 3, 4연입니다. 나름 수능 특강 문제집에도 등장했던 지문이어서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제가 나희덕 시인을 처음 인지한 건 가수 안치환의 노래 ‘귀뚜라미’의 가사가 나희덕 시인의 ‘귀뚜라미’라는 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몇 개의 시를 더 찾아 읽긴 했는데 외울 정도로 깊이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나희덕 시인이 젊은 날에 썼던 시를 모아 다듬고 다시 묶어 낸 시집을 읽으면서 잊고 있던 ‘땅끝’이란 시를 발견했습니다. 그땐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나이를 먹었는지 몇날 며칠을 이 문장이 저한테 와서 콕 박혀가지곤 아직까지 나갈 생각을 안합니다. 뒷걸음질만 허락된 땅끝에 막막하게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땅끝은 사실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러니까 결국 땅끝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바다라는 것이 왜 그렇게 위안이 되는지요.
저는 하고 싶은 기획이 엎어지거나 책 편집이 끝날 때마다 그렇게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합니다. 물론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녹록치 않으니 1년에 한 번이나 가면 잘 갔던 것 같아요. 못 가는 날도 수두룩히 많았고요. 그때는 현실에서 도망쳐 상처받지 않은 공간으로 가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는 시인의 말 처럼 저도 모르게 땅끝으로 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딛고 서고 싶어서 땅의 끝에서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서 있는 거죠. 그런데 그 땅끝이란 결국 물의 시작이어서 제가 딛고 있던 발 아래는 사실 아름다웠습니다. 실제로 요즘이라면 직장 내 괴롭힘법에 걸릴 법한 상사의 행동을 겪을 때(그땐 옛날이라 직장 내 괴롭힘법 자체가 만들어지질 않았었어요.) 발견한 바다가 삼척이었어요. 한겨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칼바람이 부는 바다 앞에서 넋을 놓고 서 있던 기억이 납니다. 새파란 물이 너무 예뻐서요. 그러고 회사로 돌아가면 또 몇달은 견딜 힘을 얻곤 했어요. 그걸 보려고 몇 번은 더 땅끝에 이른 덕분에 삼척 말고도 제가 좋아하는 조용한 바다가 몇 군데 있기도 합니다.
끝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흔한 레퍼토리일 겁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이야기에 제 마음이 끌리는 건 삶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길 제가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아마도 저는 작업을 끝내거나 어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땅끝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게 되어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바다가 아름다울 거라는 희망도 경험을 통해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읽고 계신 분들도 혹시 땅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거든 이 끝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떠올리시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발밑이 생각보다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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