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종종 ‘사건의 서사’라는 거대한 맥락을 무시한 채 개별적인 사건을 주르륵 나열하곤 한다. 각각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개인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굴도 영혼도 없이 인간성이 말소된 채 하나의 숫자, 혹은 통계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역사는 가끔 이렇게 잔인하다.
그러나 <설리>라는 영화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설리 설렌버거 기장은 놀랍게도 통계적인 숫자에 인간성을 불어넣는다. 영화에서 비행기를 허드슨 강에 착수시키고 그 역시 구조되어 딱딱한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구조 대원이 아니라 비행사에서 보낸 댄이라는 직원이다. 그는 댄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155라는 숫자를 내뱉는다. 155는 자신과 부기장을 포함한 승무원들, 그리고 모든 탑승객을 합친 숫자이다. 155라는 숫자 뒤에는 골프를 치러 비행기에 탄 아버지와 아들이,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던 딸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가 있다. 설렌버거 기장은 155가 하나의 거대한 숫자 뭉텅이가 아님을 안다. 그는 개별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한 사람씩 모여 155라는 통계적 숫자를 만들어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병원으로 이송된 뒤에도 그는 155명이 모두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침대에 편히 앉아있지도 못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의 ‘인간적인 요소’를 꼽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이런 재난 영화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다루는 방식은 이와 정 반대일 때가 많다. 누군가의 실수로, 누군가의 무책임으로, 누군가의 무능으로, 혹은 누군가의 욕심으로 인재가 벌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설렌버거 기장의 빠른 판단과 부기장의 침착함, 승무원들의 노련함과 구조 대원들의 용기로 모두가 사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유능한 리더와 완벽한 팀워크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
155명이 모두 사망했다면 설렌버거 기장의 숫자는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혹은 불에 다 타버린 사망자의 통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 모두의 맡은 바 일을 ‘제대로’ 해 냈기 때문에 155명은 각자의 일상으로, 이름과 인간성을 간직한 채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어떤 체계가, 혹은 시스템이 톱니바퀴 맞듯이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보면 잔잔한 희열을 느껴진다. 인간이 협동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의 시초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대단하고 위대한, 거대한 결심이 숭고한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제대로 해내는 것이야말로 그 안에 숭고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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