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가상세계다. 일반적인 대중들도, 예술 평론가들도, 심지어는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 본인마저도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먼 옛날로 돌아가, 인간이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점은 언제였을까? 나는 그것이 바로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꿈에는 현실에서 본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나타나기 마련이고, 숨겨진 욕망이 표출되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 당연한 듯이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자면서 꿈을 꿔본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꿈에서 하늘을 난 적이 있다면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할 수 있을 테고, 꿈에서 물 위를 걸은 적이 있다면 깨어났을 때에도 물 위를 걷는 상상을 할 수 있을 테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그 상상을 실제로 구현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을 그릴 수도 있고, 물 위를 걷는 사람을 그릴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예술의 시작이라고 본다. 예술의 본질은 꿈이다. 모호하며, 현실에서 해방된 채, 자유로운 형태로 존재한다. 관념과 현실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다. 관념의 세계는 물질적인 것들이 개입할 수가 없기에 너무나 추상적이고, 반면 현실의, 그러니까 물질세계에서는 관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예술은 이 둘을 이어줄 수 있다. 관념의 세계를 현실에서 ‘물질’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 그렇기에 예술은 언제나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노래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이 글에는 연극 <아일랜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아일랜드>의 주제를 딱 한 가지만 꼽자면 그것은 바로 ‘해방’일 것이다.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하여 정부를 상대로 싸우던 두 사람이 남아프리카의 외딴 섬에 있는 교도소에 갇혀, 목소리를 내는 방법으로 연극 ‘안티고네’를 공연하다가 교도소에 불을 지르고 모래를 뿌리며 혁명을 일으키는 결말. 그들이 원하는 해방의 세계란, 절대 권력이 무너지며 억울하게 잡혀온 이들이 모두 자유를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테다. 특히 마지막에 안티고네를 공연하다가 혁명을 일으키는 장면은 더 이상 관객들이 연극을 관조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이를 즉각적인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몰입의 효과라고 본다. 극의 연출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1. 진짜 모래를 무대에 수북이 깔아놓았다.
2. 극 중 인물들은 모래를 던지는 시늉을 하는 대신 바닥에 있는 모래를 직접 던졌다.
3. 그 순간 환했던 조명은 단숨에 꺼지고, 빨간색의 ‘불’을 상징하는 조명으로 바뀌며 수도 없이 깜빡였다.
4. 극 중 인물들은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횃불을 들고 뛰어다녔다.
관객은 얼마 안 되는 거리에서 모래가 흩뿌려지고, 건물이 불에 타고, 사람들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그 상황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연극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비슷한 장면이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설국열차>에서는 꼬리 칸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혁명을 일으킨다. 영화 <헝거게임>에서도 주인공이 쏘아올린 불붙인 화살 하나 때문에, 소외된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정부를 상대로 혁명을 일으킨다. 물론 이는 모두 보는 이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몰입 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방을 꿈꾸는 장면이 눈앞에서 직접 펼쳐졌던 연극 <아일랜드>에 비하면 잔잔한 수준의 몰입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연극이 그 어떠한 예술보다도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기에 적합하다고 본다. 아일랜드 속 두 남자는 나와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연기하는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세계 속 인물이었지만, 그들의 절규와, 그들의 눈물과,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대던 모래를 '직접' 관찰했던 관객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그들을 관조할 수 없다. 오히려, 편하게 앉아 무대를 바라보며 극의 관찰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관객들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해방된 세계에 대한 꿈을 직접 바라보며, 이 현실 말고 다른 세상을 두 남자와 함께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유는 현실에서의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된 세계에서는 더 자유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비로소, 사건을 직접 관찰하기에, 갇힌 자들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적어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갇혔다. 아일랜드의 두 남자가 갇혀있던 남아프리카의 교도소는, 나에게는 언어이자, 성별이자, 자본주의 사회이자, 권력에의 종속을 상징한다. 그들이 뿌리던 모래는 각종 억압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나의 모습과 닮아있고, 그들이 불을 질러 타들어가던 건물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억압들의 붕괴이다. 그들의 꿈은 나의 꿈이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꿈이 된다.
*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브런치 https://brunch.co.kr/@d8aec389643a40f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78Z2dXevYPh4j0BMAhX-A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