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는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에 자유롭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자연적 본능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의 순간에 놓이고, 이성을 통해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어떤 선택지가 더 옳은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각자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전날에 과음을 하고도 수업을 들으러 온 대학생이 있다. 이 학생은 몸이 힘들어서, 수업 중간에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끝까지 들을지 고민을 하다가 끝까지 듣기로 결정하고 수업을 끝마친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의 전제는,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여 행동할지가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함에 따라 나는 수업을 들을 수도 있고, 집에 갈 수도 있다. 이는 외적인 무언가, 즉 자연적 본능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의 행위에 대한 결정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정의하는 자유다.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결국 진정한 자유인이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행위를 선택하는 스스로 말미암는 사람이다.
한 가지 생각을 더 해보자. 스스로 선택하기를 포기하길 ‘선택’하는 자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어떤 살인자가 도덕성을 가지고 싶어서, ‘도덕 기계’에 들어가기를 선택했다. 그 기계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세상에서 제일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기계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을 몽땅 다 빼앗고, 폭력적인 행위를 목격하기만 해도 쓰러지게끔 만들어버린다. 그는 이제 그를 옥죄던 폭력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혹은, 행위를 선택할 수 없는 억압 속에 살아야하는가?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들과 다르게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 난 알렉스, 그는 비행을 일삼다가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이 철저히 억압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폭력성을 치료받으면 2주 만에 조기석방 될 수 있는 정부의 실험에 참여한다. 실험의 과정에서 정부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음악으로 사용했고, 온갖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준 다음 알렉스의 뇌를 조작해 폭력성을 조금이라도 띤 행위를 목격하면 구토를 하게끔 만든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알렉스는 풀려났으나 그 이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듣지 못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쉴러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는데, 쉴러는 이 시를 칸트의 ‘자유’개념에 영감을 받아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베토벤 9번 교향곡 외에도 이 영화에는 로시니 - 윌리엄 텔 서곡이 종종 나오는데, 윌리엄 텔 또한 쉴러가 지은 희곡이며, 주제는 바로 ‘자유 독립 정신’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적어도 이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는 철저히 칸트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알렉스의 진정한 자유를 지켜내고자 하는 사람은 신부님뿐이다. 알렉스의 폭력성이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정치인들 앞에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친구에겐 선택이 없었던 것 아니오? 나쁜 짓은 멈췄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가 됐잖소.”
그러자, 알렉스를 교화시켰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이렇게 말한다.
“동기나 도덕 따위는 우리 알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범죄를 줄이는 것뿐입니다.”
알렉스는 정치인의 이 말을 끝으로, 모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나는 순간에도 화내지 못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도망만 가는 신세가 되었다. 화내지 않을 것, 도망을 갈 것을 선택한 게 아니라, 그에게는 ‘도덕성’이 자연적 본능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어떠한 행위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감옥을 벗어나 신체의 자유는 누릴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보다 부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 칸트는 외부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말미암는 자를 진정한 자유인이라 부른다. 알렉스는 이제 모든 행동을 이성에 따른 선택이 아닌 자연적 경향성으로 인해 할 수밖에 없다. 칸트의 입장에서 알렉스는 누구보다 부자유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유를 노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변형된 사고실험이 가능하다.
- 흡연을 치료하기 위한 흡연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 무조건적으로 좋은 경험만 주는 경험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 성적을 올려주는 공부기계에 들어갈 것인가?
물론, 그 기계 안에 들어가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기계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선택지를 잃는다. 흡연을 할 선택, 나쁜 경험을 해 볼 선택, 성적보다 중요한 것을 따를 선택 등. 적어도 흡연의 문제에서, 경험에 대한 문제에서 그리고 공부에 대한 문제에서는 나는 자유가 없어진다. 내 이성으로 판단할 겨를 없이 외부의 억압에 나를 맡겨야만 한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를 잘 이해해야한다. 스스로 말미암을 것, 이성의 목소리를 들을 것, 스스로 옳은 행위를 선택할 것. 이것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보다 훨씬 중요하다. 알렉스의 최초의 문제는 이 둘을 혼동한데에 있다. 그는 신체가 자유롭길 원했으나, 이성을 빼앗겼고, 누구보다 부자유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어떤 것에 억압받고 있는가? 어떤 것이 나를 스스로 말미암지 못하게 막고 있는가? 어떤 것이 내 선택지를 가로막는가? 자유롭고 싶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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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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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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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콩
오늘 글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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