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월, 아빠는 오랜 항암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식이 지나고 며칠 후, 회사 동료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진짜 바빠질 겁니다.” 나보다 훨씬 더 먼저 아빠를 여읜 그의 눈빛엔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고 그때는 ‘무슨 뜻이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우연한 한달이 시작되었다.
동료가 말한, 바쁘다는 것은 망자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이었다. 금융, 자동차부터 통신, 심지어 정수기 렌탈까지 ‘상속’ 혹은 ‘해지’라는 숙제가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매일 열댓 장 남짓 종이에 아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꾹꾹 눌러썼고, 때로는 까맣게 채운 서류를 직접 들고 기관으로 가서 제출을 해야 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잘잤어?”가 아니라 “오늘 해야할 일이 뭐지?” 라는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서도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행정 기관을 방문할 때면 나는 ‘유족 혹은 상속인’으로 불렸다. 평생 ‘딸’로만 살았는데, 여러 번 들어도 그 단어들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일 처리가 복잡할 땐, 한숨이 나오고 짜증도 올라왔다. 반대로, 아빠 조차도 몰랐을 아주 약간의 돈을 찾았을 땐 용돈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몰래 손에 쥐여주는 돈 같아 즐거웠다. 그렇게 여러 색의 감정들이 뒤섞인 채 하루를 보내면 어느 새 깜깜한 밤이 다가왔고, 나는 피곤의 터널로 훅 빠져버렸다.
몇 주가 지나 남겨진 일을 기계처럼 처리하는 수준이 된 어느 날,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지금 슬퍼야 하는데, 그보다 짜증과 화, 가끔은 즐거운 마음에 둘러싸인 나의 모습이 보였다.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검색창을 열고 스크롤을 계속 내려도 원하는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물음표를 안은 채 시간은 흘러갔다.
사월이 되고, 흔들렸던 일상과 마음은 어느 새 잠잠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실에서 헐거워진 나사를 발견하고 수리를 위해 드라이버를 찾았다. 하지만 서랍을 뒤져도 공구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아빠만 쓰던 물건들이라 어디에 있는지 식구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드라이버 어디 있는지 좀 알려줘요.” 이제는 아빠 물건을 찾을 때 마다 숨바꼭질을 해야 할 텐데, 하늘에 연결되는 전화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제는 아빠가 유난히 좋아하던 산으로 갔다. 입구부터 하얀 꽃들과 초록이 가득했고, 오르막길 가운데 계곡에선 새들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아빠가 같이 있었다면 이런 표정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전까지 나는 산을 좋아하지 않아 아빠가 같이 가자고 해도 거절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산에 찾아오다니, 청개구리가 따로없다. 앞으로는 더 자주 오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는 아빠 없는 일상이 익숙해지고 있다. 가족들은 지금 아빠가 어디 멀리 출장 가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이야기 한다. 주말이면 아빠가 좋아하던 곳에 가 음식을 먹으며 함께 있던 순간을 추억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되겠지.
하지만, 오늘은 딱 한가지 붙잡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아빠의 목소리다. 언제부터 익숙하던 그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 진다. 시간이 흐르면 더 멀어져 가겠지만, 오늘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싶다. 꿈에 아빠가 나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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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KCC
Man lebt zweimal Das erste Mal in der Wirklichkeit. Das zweite Mal in der Erinnerung. - Honore de Balz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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