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첫 출근을 하던 날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사하고 나서 엄마한테 내 연봉에 관해 전하던 순간은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 내 연봉이 2,300만원이래. 한 달에 이만큼이나 벌어!” 엄마가 말했다. “2,300이 뭐 많은 거냐? 쯧….” 아, 슬쩍 의기소침해졌다. 연봉이 이 정도면 적은 건가? 이래 봬도 회사란 데에 처음 입사해 내 손으로 처음 받아보는 월급인데, 엄마한테 무시를 당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물론이고 두 번째 회사에서고 세 번째 회사에서고 연봉 ‘협상’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연봉이란 언제나 ‘정해지는’ 것이지 ‘협상’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올해 당신 연봉은 얼마일세. 아, 네, 감사합니다. 넙죽! 이런 것이 나를 포함한 저연차 편집자들의 태도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가치를 모른다. ‘회사에서 나를 써주는 것만 해도 어디야’가 일반적인 태도다. 나 말고도 세상에는 쓸 만한 인력이 널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연봉 협상이란 것을 했던 것은 네 번째 회사에서였다. 당시에 나는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행동경제학 책을 편집하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책에서 연봉에 관한 은밀한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남자들은 입사할 때 자신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 반면, 여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능력치보다 자신을 더 깎아내리면서 급속히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연봉 협상을 할 때 거침없이 자신의 능력을 부풀리며 더 많은 연봉을 요구하지만, 여자들은 ‘협상’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며 마음껏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으음, 그런가? 정말 그런 것도 같군. 어째서 그런 걸까? 그 책을 읽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나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의 가격을 타인이 매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매길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내 가격은 얼마일까? 나는 나를 얼마로 가격 매길 것인가?
그런 마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표님을 마주 보았다.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돈 얘기가 그렇게 껄끄러웠다. 뭔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인가. 내 밥그릇이 달려 있는데. 해보자, 협상!
“대표님! H과장님과 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보다 일을 덜하거나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H는 남자였고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그가 차장 직급을 달게 된다면, 저도 차장 직급을 달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자네 생각은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럼 차장 직급을 주지.”
“…!”
“그럼 연봉은 이 정도가 어떤가?”
“대표님! 저는 하반기(10월)에 입사해서 연말에 연봉 협상을 다시 한다고 입사 때 들었는데요, 연말에 협상을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현재 연봉에서 몇백만 원은 더 올려주셔야겠습니다!”
“아, 그런가? 그럼 이 금액은 어떤가?”
“…!”
나는 대표님이 처음 제시한 금액에서 딱 100만 원을 더 올려받았다. ‘협상’이란 것을 한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연봉을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나를 작게 평가하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나 없으면 곤란할 일이 많지 않겠는가? 어째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처음 해보았단 말인가! 내가 당시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연봉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면, 나는 회사가 정해놓은 그만큼의 가격으로 박제되는 것이었다. 아아, 협상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다. 평생,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밥그릇의 품질을 좌우한다.
그때 이후로는 협상이란 것을 한다. 스카우트 제의를 몇 번 받아본 적이 있다. “저는 이만큼은 받아야지 회사를 옮기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내 가격을 부른다. 어디서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내가 거절한 곳도 있고, 어디서는 내 연봉이 너무 높다며 나를 거절한 곳도 있다. 후회는 없다. 그만큼 줄 만한 규모니까 그만큼 부른 거고, 아니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상을 한다. 모든 편집자가 적어도 한 번은 사장님이 제안하는 연봉을 거절해보면 어떨까? 그런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올려주면 좋고 아님 말고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너 말고도 쓸 만한 사람은 널렸어’라고 생각하는 사장님들에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회사에 없으면 아쉬운 인재일지도 모른다. 아아, 이제 나도 사장인데, 이러다가 사장님들한테 몰매를 맞겠지? 하지만 나는 괜찮다. 나는 평생 1인출판사 사장만 할 거니까.
*글쓴이 고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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