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벨리 밖에 사는 이들이 이곳의 삶에 대해 종종 오해하는 바가 있다. 이곳에 살면 커리어에 진취적인 사람들과 네트워킹 하기가 쉬울 것이고, 그렇게 만나는 이들 중 한둘과 어쩌면 같이 창업을 할 것이고, 그렇게 창업한 회사가 넥스트 유니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럴 리가. 이곳에 4년 가까이 살아 본 내가 보기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곳의 현실이 어떠한가? 실리콘벨리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일상이란 게 있고, 일상에는 관성이란 게 있다. 매 순간 일정한 속도로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이 동네 사람들도 매일 출근길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가능한 한 빨리 침대로 퇴근하길 원한다. 평범한 직장인이 이런 관성의 힘을 벗어나 네트워킹 자리에 가는 건 이 동네에서도 예사롭지 않다. 어쩌다 네트워킹 자리에 가더라도, ‘어디서 일하세요?’와 ‘무슨 일하세요?’의 공허한 메아리를 합창 할 뿐이니, 단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기억해서 돌아오면 다행이다. 의미 있는 네트워킹은 내 경험상 매우 드물다.
그러나 올해 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 동네에서 점심 밥이 맛있기로 소문난 회사, 링크드인의 샌프란시스코 오피스에서 점심을 먹는 모임이 탄생한 것이다. 그 모임의 창립 멤버는 나, 점심으로는 바나나 밖에 주지 않는 회사에 다니는 J, IT 업계를 더 알고 싶어서 뉴욕에서 이사 온 W, 링크드인에 다니며 모임의 호스트가 되어준 P, 마지막으로 우리 전부를 이어 준 구심점 S였다. 우리 모임은 구성원의 리얼한 니즈를 해결하는 모임이었다. 공짜 밥을 주지 않는 회사에 다니는 네 명과, 혼밥보다는 같이 먹는 게 더 좋은 한 명이 모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쯤 점심에 모여서 든든한 밥 한 끼를 먹은 후, 샌프란시스코 도심이 훤히 옥상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각자가 일상에서 겪은 썰을 후식으로 내어 놓았다. 예컨대 샤프하게 생긴 S는 각종 사교 모임을 주선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이 동네에서 연애하는 게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맙소사. 내가 보기에 강동원을 닮은 그도 고전하다니. 남초 도시 Man프란시스코라는 전쟁터에서 함께 고전하고 있는 그에게 전우애를 느꼈다.
달리기 모임을 ‘코파운딩’한 J와 나는 주로 그 모임에서 대해서 얘기했다. 인공지능 연구원인 J와 개발자인 나는 회사 일보다는 즐겁게 사는 일에 관심이 더 많다. 우리는 생각만 해도 힘든 달리기 모임이 예스잼 주말 모임이 될 수도 있다고 피치하면서, 행복 회로를 마구 돌렸다. 샌프란 강동원이 아닌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무료한 (솔로) 라이프를 탈출해야 했다. 한편, 모임의 유일한 여성 싱글 멤버였던 W는 이 동네의 흔한 인간관계를 식빵 위에 얇게 펴 바른 잼에 비유했다. W는 커리어 때문에 왔다가 커리어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원래 한 사람을 깊이 알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슬프게도 W의 진단은 옳아 보였다.
남의 회사 공짜 밥도 물론 맛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각자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대감을 형성하고 난 후에는, 실없는 대화가 아니라 목적성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도 훨씬 더 즐거웠다. 예컨대 잘 모르는 타인의 창업 이야기를 듣는 일 보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P의 창업 아이디어를 같이 따져보는 게 몇 배는 더 유익했다. 그의 상황에 나를 대입해서, 과연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면 어떻게 먹고살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우리 모임은 때론 아이디어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샌프란 강동원 S는 더 나은 연애 라이프를 위해 용감하게 뉴욕으로 떠났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이번 주에는 P와 W도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둘 다 커리어를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J와 나는? 별로 놀랍지 않게, 달리기 모임을 통해 연애 상대를 찾겠다는 우리의 행복 회로는 코드가 뽑혔다. 대신 P처럼 관대한 점심 호스트를 애타게 찾는 중이다. 올해 봄에 시작한 링크드인 런치 모임이 막을 내리고 있다.
곧 드래곤볼처럼 흩어질 우리가 다시 링크드인 오피스에 모여 점심을 먹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멤버들과 형성한 몽글몽글한 감정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그 시절에 느꼈던 유대감이 종종 생각날 것 같다. 그 달달한 생각을 후식 삼아 정기적으로 카톡을 날릴 예정이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다가, 언젠가 P가 세운 회사의 카페테리아나 S의 결혼식장 런치 테이블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길 희망해본다.
(2023년 11월 초에 쓴 글입니다)
* 글쓴이 김남근 - 개발자@🍎
거창한 이야기보다 디테일하고 솔직한 일상 이야기에 관심이 더 많은 실리콘밸리 보통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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