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의 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

나이듦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건_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_메이

2024.02.14 | 조회 1.1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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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은 인생이 달라지는 경험(Lebensverändernde Erfahrung) 이었어!” 몇 달 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한 독일인 친구가 3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말했다. 기차가 단 한 대도 지연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며, 도시는 깨끗하고, 편리하며, 맛있는 것도 많다고 감탄하는 걸 멀뚱히 듣고 있었다. 티비에서 “김치 맛있어요!”를 외치는 외국인을 보는 것 마냥 왠지 그런 말들이 새삼스러웠달까. 인생을 바꿀만한 경험이라길래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대했는데 너무 사소하고 뻔한 얘기라 사실 좀 실망하기도 했다.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고 싶었다거나, 한국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지오다노를 가서 좋았다는 말을 듣고는 어쩐지 안타까워서 다음 번에 또 서울에 갈 땐 좋은 곳들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 친구는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서울에서 평생을 살았으면서 어떻게 여기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 질문은 우리 부부에게 꽤 자주 화두가 되었다. 그러게, 남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더라도 번잡한 대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일자리를 얻는데 어째 우리는 정반대로 살고 있네, 하고 웃었다. 둘 다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다가 남편의 유학을 위해 독일에서도 조용하고 작은 도시에서 살고있다. 천만 도시 서울에 비하면 정말 조그마한 30만 도시 본(Bonn)에서 주로 생활하지만, 정확히 우리 신혼집은 본 바로 옆에 있는 조금 더 한적한 쾨닉스빈터(Königswinter)에 있다. 쾨닉스빈터는 인구 4만의 아주 작은 도시다. 서울에서 쾨닉스빈터로의 이동은 실제로 우리에게도 꽤나 ‘인생이 달라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대단한 커리어나 학위, 어학 실력 같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변화는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요즘은 부쩍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어릴 적부터 삶의 로드맵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어떤 학교에 갈지, 어떤 일을 할지, 얼마의 소득을 벌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노력하다보면 제법 이뤄낸 것도 있고 전혀 예상과 다른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의 삶을 하나의 줄기로 쭉 이어서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늘 막히는 구간이 있었다. 바로 돈을 벌지 않는 노후에는, 흰머리로 가득한 내 모습은 어떨까? 라는 지점에서였다. 늙은 나의 모습은 아예 상상도 되지 않아서, 대체로 생각을 멈추고 ‘젊은 시절 일단 돈을 많이 모아두면 노후에는 편안하겠지’ 같은 뻔한 결론을 내리고 만다. 마치 내 인생이 열심히 일하는 정년에서 멈추는 것처럼, 생산성 없고 더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는 노후의 삶이 어쩐지 두렵고 초라한 것 같아 더이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우리 할머니와는 다를 것 같은데, 올해 환갑인 엄마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고, 대체 나의 노후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던 노후의 모습을 지금 이 곳에서는 매일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있다. 이 곳 쾨닉스빈터에는 어딜가나 백발의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커피 한 잔 하러 들른 카페에서 흰머리로 가득한 가운데 우리 부부가 있다보면 젊음으로 의기양양해질 틈이 없다. 치열한 시기를 지나 이제야 여유있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나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하는 부러움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더이상 출근할 곳이 없어 허탈하고, 은퇴자로 살아가며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과업을 무사히 마친 졸업생들처럼 여유가 있다. 물론, 당연히 빈곤층은 존재하고, 여유를 부리는 사람이 전부가 아닌 것은 알지만, 확실히 이렇게나 많은 노인들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장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비단 소도시만이 아니라, 독일의 어떤 대도시를 가도 길거리에서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백발의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보면 사랑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설렘과 열정, 헤어지기 아쉬워 애틋한 젊은 연인들의 사랑과는 다른 형태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노부부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보면 어딘가 애틋해진다. 나와 남편도 이제는 익숙해진 오래된 커플이 아니라, 앞으로 하얗게 머리가 새어가며 서로의 아픔과 성장과 외로움을 안아주는 사이로 깊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흰머리가 보기 좋아서 나이가 들면 새치 염색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하면 남편은 “금발 머리는 흰머리가 예쁘게 새지만, 흑발은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니까 새치 염색을 해야 할거야" 같은 소리로 산통을 깨곤 하지만.

매주 수요일 우리 부부는 프랑스어 기초 수업을 듣고 있는데, 평일 오전 수업이라 그런지 우리를 포함해 서너명의 젊은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발의 노인들이다. 고급 프랑스어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해야만 가치있는 게 아니라 기초 수업임에도 더없이 진지하다. 대학생들 마냥 스트레스받으며 시험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는 않는다. 배움 앞에 겸손하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고 복습에도 성실하다. 가끔 직업을 묻는 수업에서는 다들 멋쩍어하며 은퇴를 했다고 답하는데 젊은 시절 그들은 판사였고 공무원이었고 청소부였고 IT 기업의 직장인이었고 한 시절에는 임원이었다. 그냥 직업이 있던 시기가 지나갔을 뿐 노년의 삶은 또 다른 배움으로 시작되고 있다.

 

노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젊은 시기에 흔히 하지 못하는 경험이자 감사한 기회처럼 느껴졌다. 배우자 또는 연인과 손을 꼭 잡고 데이트를 위해 예쁘게 차려입은 백발의 커플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상상하면 늙음이 조금은 덜 두려워진다. 대학 강의를 청강하며 열심히 질문하던 할아버지, 카페에서 철학을 주제로 대화하다보면 함께 대화를 해도 되겠냐던 할머니가 어떻게 수동적이고 무능하고 초라할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게 사랑은 하얗게 샌 머리로 함께 손잡고 걷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왕이면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두 발로 걷고 싶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싶다. 유행을 따르진 않아도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패션에도 계속 관심을 둘 것이다. 꼬장꼬장하게 시비를 걸고 다니는 옹졸한 노인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부터 마음을 너그럽게 쓰고 다정함을 연습해보려 한다. 이미 다 늙어서 배워서 뭐하냐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평생 배우고 싶고, 배우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일이니 지금부터 미루지 말고 새로운 것을 꾸준히 배워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늙음은, 나이듦은 삶의 가장 마지막에 맞이할 목적지이자 젊음의 방향성이 된다. 대기업 취업이나 연봉 얼마 같이 이루자마자 탁 하고 허무해질 이정표처럼 결국은 다시 길을 잃게 하지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취가 아니라 내적으로 충만한 시간들로 계속 채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 하나하나 들리고 싶은 정류장을 들러서 늙어서도 계속 멈추지 않고 새로운 정류장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이 작은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나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경험인 건 확실한 것 같다.

 

* '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 글쓴이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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