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택배가 오늘도 오지 않았다._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_메이

2023.10.20 | 조회 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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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로켓배송이 생긴 후로 한국에서는 대형 마트를 가는 일은 연중 행사에 가까웠다. 전날 밤에 시킨 물건이 오늘 아침 출근 전에 현관문 앞에 도착해 있고,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반품 신청을 한 후 다시 현관문 앞에 두면 기사님이 직접 수거해가니 식재료나 생필품을 사러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집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복도식 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우리 층에 있는 모든 현관문 앞에 로켓 배송 박스들이 쌓여있는 풍경에 익숙해졌다. 실수로 옆 집 물건이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놓여있을 때는 말없이 슬쩍 가져다줄 뿐이었다.

독일의 소도시로 오게 되면서 한국에 비하면 한참 느린 배송 서비스 때문에 식재료는 무조건 직접 구매하게 됐다. 집 근처 대형 마트로 장을 보러다니는 건 어쩐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장바구니를 챙겨서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고르고, 정육점에서 신선한 고기를 사고, 과일을 꼼꼼하게 고르다보면 이미 건강하고 푸짐하게 한 상 차린 듯한 뿌듯함이 몰려왔다. 식재료를 눈으로 보고, 손에 들고 올 수 있을 만큼만 가볍게 사고, 며칠 후면 다시 오늘의 식사를 위해 장을 보러 나가는 일에 익숙해진 지 벌써 만 2년이 훌쩍 넘었다. 

필요한 식재료를 적당한 양만큼 사서 신선할 때 요리할 수 있는 건 사실 집 근처에 대형 마트가 여러 군데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가끔 같은 도시에 살아도 대형 마트가 주변에 없는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면, 먹을거리를 잔뜩 사가는 일도 있었다. 그마저도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며칠씩 연휴가 있으면 엄청난 인파에 합류해 양손 가득 식재료를 사와야 하는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처음에는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도 없고, 휴일이면 며칠씩 문을 닫는데 익숙해지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종종 난감해지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꼭 배송으로만 받을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 독일에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운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배송 기사님 운'인데,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흔히 웃으며 하는 농담 중 “물건을 주문하긴 했지만 내가 받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다소 과장이 섞여있긴 하지만 꼭  틀린 말도 아니다. 만일 무거운 물건을 주문했거나, 그런데 하필 계단이 없는 높은 건물에 살고 있거나, 한국에서 받을 물건이 있거나 한다면 늘 내 집 현관문 앞까지 물건이 배송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남편과 내가 둘 다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격리 중인데다 요리를 할 기력도 없어서 온라인 한인 마트에서 200유로 이상의 밀키트와 해산물 등을 주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도착 예정일 저녁이 되었는데도 물건이 오지 않아 배송 조회를 해보니, 황당하게도 이미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자세히 보니 물건은 우리 지역 물류센터에 보관 중이며, 고객이 집으로 받길 원치 않고 물류 센터로 직접 찾으러 가겠다며 배송 옵션을 변경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물류센터로 그 무거운 짐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는 건데, 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물류 센터 영업 시간이 끝났기에 다음날 오전 택시를 타고 창고에서 받아온 물건들은 예상했듯이 냉동 식품은 다 녹고 김치는 다 쉬어서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박스를 뜯자 해산물이 담겨있던 물이 다 녹아 쏟아지면서 주방 바닥은 엉망이 되었다.

거의 모든 식재료를 다 버려야 하는 지경이 되자 화가 나서 배송 업체와 주문한 마트에 모두 컴플레인을 했지만, 역시나 “배송 옵션이 변경된 것일 뿐 그로 인한 책임은 질 수 없다"는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사실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박스가 크고 무겁거나 계단이 많으면 각종 이유를 대며 배송을 하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냉동 식품을 주문해서 배송이 지연되니 다 녹아 쓸 수 없게 된 건 나의 불운일 뿐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 사람이 있어도 초인종 한 번 울리지 않아 놓고는 “집에 아무도 없어서 배달을 완료하지 못했다.”는 메시지만 남겨놓고 며칠씩 물건을 주지 않고는 결국 반송되게 만드는 일도 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온 국제 소포의 경우 불성실한 배달 기사를 만나면 끔찍한 상황이 되는데, 며칠씩 외출도 하지 않고 택배를 기다려도 “부재중이라 택배를 전달할 수 없었다"는 사유로 고스란히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폐기가 된다.

“내가 물건을 주문했는데 왜 집 앞까지 배송해주지 않지?” 같은 불만도 어떤 사회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물건이 무거워서 배달하지 않았다고 답변하진 않지만, 수취인이 부재중이었다거나 물류 창고로 직접 오고 싶어했다는 둥 거짓말을 해서라도 배달을 회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배송사도 그렇게 엄격하게 배송 기사에게 책임을 엄격하게 묻지는 않는 것 같고, 판매자가 대기업이면 환불을 받을 수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환불도 못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답답하고 후진적인 배송 시스템 때문에 온라인 주문은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가끔 이용하고 주문을 할 때면 늘 약간의 불안함을 느낀다.

그러다 무거운 물건을 주문했는데 DHL 배송 기사가 활짝 웃으며 “구텐탁!” 인사하고 물건을 건네주면 어찌나 고마운지. 2층 집인 우리 집까지 가져다주지 않고 1층 현관에서 전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은 없다. 배송 사고가 워낙 많으니까 친절하고 성실하게 우리집 현관까지 배달을 해주면 그저 고맙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다보니 내가 주문한 물건이 나에게 도착하는 그 모든 과정이 당연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배송 시스템만 놓고 본다면 편리하고 빠르고 정확한 한국 배송 서비스에 비해 한참은 부족한 독일의 배송 시스템 때문에 화가 나고 손해를 본 적도 많았지만, 애초에 사람이 하는 서비스니 실수와 문제는 발생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라는 마음도 든다.

며칠 전 한국 뉴스를 보다 사실 좀 충격적인 기사를 봤다. 편리함이 극에 달하다 못해 너무 당연해진 나머지, 택배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거운 물을 수십만원 어치 주문해서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로 올라오게 한 다음 고의적으로 환불을 했다는 것이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물건을 받는 게 당연하다 못해 이제는 배달 기사를 하나의 인격으로도 존중하지 않는 걸까. 배송이 많은 시즌이면 택배를 하다가 과로사한 사람들의 뉴스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빠르고 정확한 배송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떠올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독일에 오고 나서 느리고 불친절한 행정과 각종 서비스로 인해 거의 기다림을 수양하듯이 살고 있다. 답답해서 자극적인 음식이 땡길 때도 많지만, 음식 배달도 거의 안 되는 소도시에 사는 덕분에 손쉽게 배달 음식도 시켜먹지 못한다. 답답함에 몸부림치던 시기도 지나 지금은 모든 건 내가 필요해서 선택한 일이고, 누군가 나를 대신해 서비스를 해주는 대가가 엄청나게 비싸고, 때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거란 걸 받아들이고 있다. 나도 새벽 배송과 24시간 배달을 누리고 살 땐 생각조차 못했던 것들을 불편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불편함도 꽤 도움이 된다.

* 번외1. 독일은 현관문 앞에 택배를 두면 도둑맞을 수 있어서 거의 대부분은 대면 전달만 한다. 따로 맡아줄 이웃이 없는 경우에는 택배를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빠른 배송 서비스만이 아니라, 집 앞에 물건을 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한국이기 때문에 로켓 배송도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던 것 같다.

* 번외2. 얼마 전 공항에서도 항공사가 내 캐리어를 분실했는데, 찾으면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듣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그냥 아끼는 옷들을 잃어버려서 슬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며칠 만에 집으로 캐리어가 왔다. 아예 오지 않았다는 사람도, 몇 개월 뒤에 받았다는 사람도, 환승 공항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찾으러 갔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지퍼 하나가 부서져서 왔어도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뻤다.

 

* 메이 -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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