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_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_메이

시스템의 부재가 악인을 양성한다.

2023.07.28 | 조회 1.54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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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독일 엄마들은 사교육에 집착하지 않는데, 한국 엄마들은 유독 극성이야”라는 말은 사실일까? 현상만 놓고보면 그렇다. 실제 독일에서는 사교육에 대한 인식 자체가 학교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이라는 인식이 많고, 주변에 사교육을 받아본 학생이 많지 않다. 물론 독일에서도 알게 모르게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과외를 받는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한국 엄마들이 유독 극성이라서 사교육은 사라질 수 없고, 대한민국의 사교육 문제는 유독 경쟁심이 강한 한국인 ‘종특’으로만 환원되는 걸까?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독일 사람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줄을 잘 서고 양보를 잘 하기로 유명하다. 당연히 소수의 예외인 사람들도 있지만, 독일 생활 3년차인 나의 경험으로는 대체로 그러한 것 같다. 어떤 가게를 가든 줄을 잘 서고 새치기를 하지 않으며 앞사람이 오래 걸리더라도 컴플레인 없이 잘 기다린다. 그런데 재밌는 건 기차역에서만큼은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다. 기차가 도착하면 양옆에서 사람들이 쏟아져서 들어가고, 무리하게 앞사람을 밀지는 않더라도, 너도나도 질서없이 기차를 탄다. 왜 줄을 잘 서던 독일인들이 기차역에서만 줄을 서지 않는지를 따져보면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한국의 지하철은 지하철 문이 아주 정확한 곳에서 열리는 나머지 2-3, 4-1과 같이 게이트가 정해져있다. 사람들은 어디서 문이 열릴지 예측이 가능하고 그 앞에 줄을 선다. 반면 독일은 기차가 문이 열리는 곳이 정해져있지 않다. 어느 정도 큰 범위 내에서 기차가 이쯤 서겠지하는 예측은 되지만, 늘 오차가 있기 때문에 기차가 도착하면 빠른 걸음으로 문이 열리는 곳을 향해 간다. 즉 줄을 서고 싶어도 줄을 설 수가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게다가 독일 기차는 지연되고, 취소되고, 게이트가 수시로 바뀌는 등 예측이 불가하기로 악명 높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낮고 예측이 불가한 경우 사람들은 나의 목적(기차를 제 시간에 타겠다는)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 없이 문이 열리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유독 한국에서 잘 지켜지는 규칙도 있다. 바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이다. 며칠씩 집을 비워 문앞에 택배가 놓여있어도, 카페에서 노트북을 놓고 화장실을 가도, 공원 벤치에 명품 지갑을 떨어뜨려도 누군가 훔쳐갈까 걱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종종 택배를 노리는 도둑이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유럽 국가에 비하면 한국은 정말 안전한 편이다. 내 물건을 잠시라도 공공장소에 놓은 채 한눈을 판다는 건 유럽에서는 그냥 도둑에게 훔쳐가라는 것과 다름없다. 매일같이 집집마다 현관 앞에 택배를 놓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한국의 분위기가 새삼 그리울 때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유독 절도는 나쁘다는 도덕 의식이 강하고, 독일은 반대인걸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어디든 CCTV가 있고, 절도가 발생했을 때 바로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 수사를 한다면, 독일은 CCTV가 없는 경우가 많고 소매치기를 당해서 신고해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즉 똑같이 소매치기를 했을 때, 즉각적으로 잡힐 확률이 높고 절도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이 적으면 소매치기를 하지 않고, 계속 훔쳐도 별다른 조치가 없으면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건 사회적으로 유독 나쁜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를 학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질'도 마찬가지다. 갑질을 하는 이득이 더 크니까. 갑질을 하면 누구 하나라도 사과를 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원하는 서비스를 받게 될 확률이 개연적으로 높으니까. 갑질을 하면 손해배상을 해야하고,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할 걸 알면 갑질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일 식당에서 손님들이 정중한 건 손님들이 꼭 수준이 높아서라기보다는, 독일의 서비스직에게 함부로 갑질했다간 쫓겨나기 딱 좋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내가 급해도 빨리 계산해달라고 식당 문앞까지 달려가서 카드를 내밀면 일단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식당의 규칙을 어기면 그들도 친절하게 서비스하지 않기 때문에, 아쉬워도 느린 서비스에 크게 항의하기가 어렵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제 아무리 내가 원하는 서비스가 아니라고 해서 윽박을 지르고 공짜로 원하는 걸 더 받아가는 행위가 절대 안 되는 규칙이 명확하면(쫓아내고 신고를 한다든지 등) 개개인의 악한 심성으로 갑질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처음 사례로 돌아가서, 만약 입시 경쟁이 지금처럼 소수의 엘리트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든 수험생이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라면 어떨까? 여전히 학부모들이 극성일까? 독일의 사례처럼 어느 대학에 입학하든 입학은 어렵지 않고, 졸업 요건이 까다로워서 대학 공부의 비중이 더 높아진다면 적어도 미성년자인 학생들에 대한 부모의 사교육 경쟁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기업이 채용 시에 대학 간판보다 전공을 더 중요시한다면 모든 수험생이 SKY만을 목표로 하는 지독한 입시 경쟁은 사라질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입시 시스템 자체가 치열한 사교육 경쟁을 양성하고, 극성 엄마는 그렇게 탄생하게 된다.

사람을 믿지 말고, 시스템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탓하지 말고, 시스템을 탓해야 한다.

 

시스템이 부재하고, 규칙이 지켜지지 않고, 나를 지킬 방법이 오직 나의 노력 뿐인 곳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약간의 손해는 감수해가며 살기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기대다. 상대방을 협박하고 윽박을 질러서 나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너도나도 윽박을 지르기 마련이다. 만약 상대방을 협박하고 위협했을 때 돌아오는 게 나의 불이익이라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운동장에 100명의 사람들과 100개의 빵을 놓고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빵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줄을 서는 사람에게만 하나씩 주고, 새치기를 할 경우 빵을 먹지 못한다는 규칙을 정한다면 사람들은 줄을 선다.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어떤 사람은 이타적이라서 행동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모두 나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뿐임에도 규칙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 양상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아무런 통제없이 매일매일 형제에게 장난감 하나를 놓고 알아서 나눠먹으라고 하면 극소수의 선한 아이들이 아니고서야 무조건 싸움이 난다. 그 때마다 싸운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절대 싸워서는 안 되고 양보를 해야만 두 사람이 함께 놀 수 있다는 규칙을 세워야 한다. 규칙이 없는 야생에서 오직 사람들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은 없다.

체벌을 반대하는 오은영 박사가 서이초 사태를 만들었다는 악플이 달리고 있다. 사실 오은영 박사가 가장 많이 강조하는 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단호한 가르침과 규칙에 대한 학습이었다. 꼭 처벌을 해야만 상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로 공동의 규칙을 학습한다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즉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 아이에게 불이익이 왔어도 담당 선생님에게 인신 공격을 하고 윽박을 지르고 협박을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규칙이 명확했다면, 절대로 사람 대 사람 간의 갈등 해결이 아니라 규칙에 기반한 해결 절차가 있었다면 이토록 고통받는 피해자가 많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을 탓하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다. 지금 당장 체벌 금지를 주장하는 오은영 박사에게 악플을 달고, 선생님에게 갑질한 학부모를 찾아 신상 공개를 해서 망신을 주고, 폭력적인 어린이를 찾아 혼쭐을 내고 학교에서 교육도 못 받게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교사가 학부모에게 직접 민원을 듣지 않도록 전담 직원을 채용하고, 전담 직원 또한 여느 서비스직과 마찬가지로 인신공격을 받지 않도록 법을 정비하고, 퇴근 후 어떠한 연락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다. 폭력적인 학생을 선생님이 직접 체벌해 두 사람 중 누가 더 힘이 센 지 겨룰 게 아니라, 학교 안에 안전을 위해 상주하는 교육 경찰을 채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를 몰라서 마녀사냥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고, 제 아무리 국민들이 공분한들 제도가 정비되지 않는 무력감을 학습한 나머지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 나쁜 사람을 내가 직접 혼내주겠다는 마인드로 발전했을 지 모른다. 그래도 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 이전에 수많은 갑질과 폭력이 난무하게끔 방치하는,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이 그 어떤 환멸보다 가치있다고 믿는다. 뿌리깊은 갑질 문화가 마치 한국인들과 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탈조선’ 말고는 모두 불행한 선택이 된다. 하지만 시스템 없는 세상은 어느 곳이라도 지옥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환멸하며 경쟁만 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붙잡아야 하는 건 나와 누군가를 지켜줄 체계라고 믿고 싶다.

 

* 메이 -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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