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 화폐를 고민하다니
긴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파이낸스 담당자가 제시한 두 가지 옵션을 앞에 두고 엘리는 고민에 휩싸였다. 동공은 흔들리고 손가락은 아무런 죄도 없는 마우스를 부여잡고 필요 없는 클릭을 반복하고 있다. 본격적인 프리랜서가 된 그녀는 스케쥴링뿐 아니라 이제는 그녀가 받을 급여 화폐 종류마저도 선택해야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에이전시를 통해 프리일을 할 때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당으로 결정되는 통역과, 출발어의 단어당 요율을 합의 하는 과정은 있었지만, 통화(currency)를 두고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그녀가 맡고 있는 번역프로젝트 중 하나의 의뢰회사는 대부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글로벌 SNS 플랫폼에서 뻗어 나온 블록체인 재단이다.
10 개국 이상의 번역 TF팀으로 구성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만큼, 미국 달러는 글로벌 기축 통화이니 글로벌 직원들에게 급여지급 수단으로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암호화폐인 스테이블 코인은 왜?’. 우리나라에서는 은행 계좌 개설이 무척이나 용이한 편이다. 본인이 신분증을 들고 직접 가면 간단히 만들 수 있고, 직접 가지 않아도 신분 확인 과정을 거쳐서 은행 계좌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려운 편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국가에서 개인이 계좌를 개설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얼마전에야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암호화폐 사용이 더 용이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돌고 돌아 온 블록체인 프로젝트 번역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지만 해당 분야 제반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통역과 번역은 불가능하다. 엘리가 IT 회사에서 근무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었다. 기초적인 IT 지식과 전기차 베터리의 복잡한 제조 과정, 그 제조 과정에 필요한 IT 기술을 담은 내용이었다. 번역과 통역은 출발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근데 옆의 책상에서 들려오는 한국어들조차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녀의 눈은 스크린을 향한 채, 귀를 종긋 세워 주변의 개발자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애를 썼다. 외계어와 같은 그들의 대화에 항복했고 결국 첫 세달 동안 아침마다 각 담당 개발자들과 회의를 빙자한 Q&A 내지는 교육 시간을 잡아 해결해 나아갔다.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도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번역업체에 저렴한 가격으로 번역을 의뢰했다가, 국내 사용자들에게 컴플레인을 받고는 그녀에게 다시 의뢰한 것이다. 블록체인 생태계, 각각 다른 블록체인별 다른 지갑, 지갑 주소와 같은 맥락이 이어지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나, 통용되는 용어를 알지 못하면 번역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퇴근 후 스터디를 하고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 하며 공부했던 시간이 그녀에게 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작년에 강연장에서 우리나라 대표적 플랫폼 회사 관계자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지갑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는데, 집 주소를 적어 주신 분들이 계셨어요.”
결국 스테이블 코인으로 받은 급여
달러를 받을 수 있는 통장이 없었던 그녀는, 결국 스테이블 코인으로 그녀의 급여를 받기로 했다. 외화 통장 개설을 알아봤는데 개설한 뒤 입금확인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송금 비용을 계산해 보니 거래될 급여금액에 비해 너무 번거롭고 부담스러웠다. 작년 블록체인 기술과 생태계에 매료되어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하며 탐구하듯 빠졌었다. 당시의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워 손을 바들바들 떨며, 10초정도 유튜브를 보고 일시정지를 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과정을 반복하며 가입했던 해외 거래소를 통하면 수월하게 스테이블 코인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도 번역료를 받지 못했거나, 힘들게 받았다는 프리랜서의 이야기가 떠올라, 일단 준다고 할 때 받아놓자는 마음도 있었다. 해외에 있는 회사 인지라 급여을 받지 못했다고 노동부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컴맹수준에서 비자발적 진화를 해야 했던 그녀
1달러와 같은 가치로 유지되는 코인이 스테이블 코인이다. 엄청나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 현물 화폐가 아닌 가상화폐로 급여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는 해당 스테이블 코인 송금이 가능한 해외 거래소상의 지갑주소로 받았다. 코인 투자를 하지 않는 그녀는 송금내역을 확인 하자마자 스테이블 코인을 국내 거래소에 입금이 가능하고 거래 수수료가 저렴한 가상화폐로 바꾼 뒤, 국내 거래소로 송금했다. 국내 거래소에서 송금된 가상화폐를 원화로 바꾸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지만, 수수료도 많이 들지 않았고 모든 과정을 거쳐 결국 그녀의 통장에 입금된 노동의 대가를 보니 뿌듯했다. 해외의 상사들과 살짝 긴장감이 돌았던 요율 협상 과정도, 회사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던 열정가득했던 시간도, 가상지갑을 만들며 클릭 하나 하는 것에 큰 일이 나는 줄 알고 벌벌 떨었던 순간들 모두.
그녀에게 컴퓨터는 통번역 준비과정에서 필요한 인터넷 검색을 위한 도구였다. 컴퓨터에 뭔가 이상 증상이 생기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어렵고 친해지기 힘든 존재였달까. 사실 통역 현장에서는 노트테이킹용 노트와 펜이면 충분했다. 번역할 때도 워드용 소프트웨어 사용이 전부였다. 한글, 워드, 피피티 등등. 거의 컴맹에 가까웠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용하는 단축키조차 거의 없었다. 그 흔한 복사, 붙여넣기 단축키 (Ctrl+C, Ctrl+V) 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마우스로 드래그하여 복사하고 붙여넣기를 했었다. 그러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IT회사에서 일하면서 노트북 안에서 통역을 하고, 사내 컴퓨터 망 내부에서 직접 번역을 하면서 컴퓨터와 무조건, 운명적으로 가까워져야 했다. 이제는 왠만한 소프트웨어를 시험적으로 사용해보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잘못된 클릭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다시 꼈다 켜면 왠만한 것은 해결된다는 공공연한 비법도 천연덕스럽게 활용하고 있다.
매번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드는 프리랜서 엘리, 앞으로는?
이제 철밥통은 없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한 회사에서 2년 이상 근무할 수도 없고, 불안정한 일들을 유지시켜 나가야 하는 엘리는 그 덕에 항상 고군분투 해야했다. 매번 새로운 미지의 세상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 용기가 새로운 세상과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한다. 이번 프로젝트 처럼 그녀가 혹시라도 모를 일을 위해 공부해두었던 분야의 일이 찾아 오기도 하고, 의뢰받은 업무가 그녀를 또 다른 세상으로 매혹시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녀가 통역한 VC(Venture Capitalist)의 세계에 홀리듯 빠져 몰입 중이다. AI와 블록체인을 공부하면서 몇몇 VC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통역과 번역을 위해 밀도있게 공부하고, 통역을 하면서 VC의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시간이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약간은 짜릿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참으로 신기하고 알아갈 수록 끊임없이 궁금한 것들 투성이다.앞으로도 미지의 광활한 세상으로 그녀를 던질 수밖에 없는 선택들이 그녀를 어떠한 세상으로 데려다 줄지 모르겠지만, 그저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오늘도 그녀는 내일 새벽 2시에 예정되어 있는, 자발적 참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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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순수국내파 ‘통역사로 먹고살기’를 출간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세상과 세상, 언어와 언어사이의 소통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전세계와 소통하며 그로인해 확장된 경험을, 국내파로서 영어교육과 학습에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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