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위로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주기도 한다.
9월 초 시험을 보기 위해 타 지역으로 여행을 해야하는 유관기관 직원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갑작스런 유산 때문에 시험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어제 퇴원했고 시험 주관기관에는 긴급상황에 의한 시험 연기를 요청했노라고 하며 진단서를 첨부했다.마음이 아팠다. 답장쓰기를 클릭해놓고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막막했다. 수신자에 팀장님이나 팀 메일주소가 없길래 메일을 전달하며 이런 경우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물었다.고작 하루 쉬었다고 수신함을 꽉 채운 이메일들을 하나씩 쳐내면서도 문득문득 그녀가 생각나서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유산으로 인한 심리적, 정신적 충격'이라는 말이 적혀있는 진단서를 보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적당한 위로를 해주었을까,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생각기차를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깊게 묻어둔 기억이 딸려올라왔다.
둘째가 생겼던 적이 있다. 세상에 나오진 못했지만. 당시 우리 팀은 심사 작업이 있어 몇달째 주 7일 근무를 하고 있었다. 직속 상사인 차장과 팀장님에게만 이유를 알리고는 주말을 끼고 수술을 했다. 하루를 쉬고 3일만에 출근 해 컴퓨터를 켜고 쌓인 메시지와 문서를 처리하고 있는데 차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뭐부터 하면 돼요?" 라고 묻자 그 사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뭐부터 하면 되냐고? 그게 과장이 할 소리야? 심사장 비우고 사무실에 처 읹아서? 야, 알바하는 OO 씨 도 오자마자 자기 일이 뭔지 딱딱 알아서 하고 있는데, 과장이나 달고서는 니가 할 일도 모르냐?" 욕설로 끝나는 호통소리를 듣다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주말도 없이 매일 야근까지 하며 심사에 매달리다가 3일이나 자리를 비웠다고요! 그동안 내가 하던 일을 누가 어떻게 나눠서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걱정을 해달래? 위로를 해달래? 기대도 안했지만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니예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눈물이 얼굴로 흐르는 것만은 차장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리를 피했다.
출근하며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어떻게하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나 하는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다시 출근 하자마자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폭언을 쏟아낼지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2014년이었다. 잘못하면 얼굴로 재떨이가 날아온다던 케케묵은 옛 시절이 아니라, 2014년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미국행이 결정되자마자 나는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최종 결과 선정에서 차장은 실수를 저질렀고, 나는 그 일을 함께 수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아있는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이상 그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업무를 마무리 할 때 내가 하는 일이 있다. 오늘 수신된 이메일 중 답변이 필요한 메일, 빨간 깃발을 꽂아두었던 이메일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깃발 표시를 해제하는 일이다. 메일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혹시 빠진 것이 없나 하고 있던 차에 팀장님이 이메일을 보냈다. 아침에 포워딩했던, 유산으로 여행을 할 수 없게된 유관기관 직원 이메일에 대한거였다. 안그래도 전달했던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 없어서 이 건은 내일 할 일 목록에 적어두었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메일을 열었다.
마음이 아프겠다며, 이건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일거라고, 이 시기에 우리에게 연락해줘서, 시험 연기 신청까지 해주어서 고맙다고, 예약된 여행이나 기타 다른 업무는 우리가 처리할거고, 연기 신청이 접수되어 다음 시험 날짜가 확정될 때까지 더 해야 할일은 없다고, 걱정말고 몸과 마음을 돌보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보면 어떻게냐는 팀장님의 메시지를 보며 울컥했다.
2022년, 아프리카에 있는 누군가를 위한 메시지가 2014년 한국의 사무실에서 묵묵히 폭언을 견뎌내던 나까지 위로해주는 듯했다. 이런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와중에 나와줘서 고맙다." 이 한마디면 그렇게 깊은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눈물을 닦고, 아프리카에 있는 직원에게 답장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팀장님과 나의 마음을 담아서.
팀장님에게도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메일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내 기억까지 소환되어 마음만 아프고 그 직원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했는데 그 말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그녀도 나도 조금의 위로를 받을 것 같다고 말이다. 팀장님은 다시 답장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은, 여자라면 잊을 수 없는 일인거야. 계속 다시 찾아올테지만, 괜찮아."
눈물을 닦고, 더 나은 일잘러가 되기로 맹세했다. 8년만에 닿은, 나를 향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까지 어루만져 준 위로의 한마디가 고마워서. 나도, 팀장님도 언젠가는 이 팀을 떠나겠지만, 이 팀을 자발적으로 떠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내가 팀장이 된다면, 그녀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일잘러가 되고 싶고, 나는 그녀에게 아직 배울게 많이 남아있으니까.
17일에 발행했어야 하는데 개인 사정으로 늦게 발송했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 매달 17일 ‘일상의 마음챙김’ 진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뉴스와 시사 인터뷰를 맛깔나게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참여자들의 의미있는 경험을 비추기 위해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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