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내가 만난 성격검사 #2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기린

2022.09.05 | 조회 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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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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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성격검사 #1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TCI 검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였다. 병원 수련을 받으면서 처음 검사를 배웠는데, 특히 남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TCI 검사는 유형을 나눠주진 않지만, 여러 기질적인 특성이 강한지 옅은 사람인지 알려준다.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갖고 도전하는 성향, 위험한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 회피하는 성향,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성향, 곧바로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꾸준히 밀고 나가는 성향. 누구나 이러한 기질과 관련된 신경생리학적인 차이를 갖고 태어나고, 그 유전적인 특성이 기질로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TCI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었다.

 

MBTI와 에니어그램 유형마저 똑같은 남편과 적당히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TCI에 와서야 늘 찝찝하게 생각했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늘 느긋하고 적당히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타입이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편이었다. 이것은 여행 준비를 할 때 가장 극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동선이나 몇 천원이라도 더 저렴한 숙소를 찾기 위해 최대한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알아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몇 몇 사이트만 검색해보거나 그마저도 잘 안되면 이미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정보를 얻고는 말았다.

이것은 신혼여행부터 시작된 일이긴 했다. 남편과 나는 오래 전부터 묵고 싶었던 호텔이 있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사진을 보고 찜해놓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일정을 늦게 잡아서인지 마침 우리가 가는 날 자리가 없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지하며 포기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숙소 측과 여러 번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1박은 연계된 숙소에서 묵고 나머지 일정을 그 숙소에서 묵는 방식으로 타협을 보고야 만 일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나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 준비는 슬그머니 내가 도맡게 되었다. 그것이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여행지의 숙소부터 일정까지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 부담이 싫기도 했지만, 또 가열하게 원하는 만큼 알아보고 준비할 수 있어 좋기도 했다. 나는 몸이 고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도달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일할 때도 그랬다. 나는 프로젝트 마감이 다가오면 한 주 전부터는 새벽 한 두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도표와 논문에 매달리곤 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나에겐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만큼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남편은 몸을 헤치면서까지 그렇게 몰아붙여서 일을 해 낼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남편은 당장 다음 주에 프로젝트 발표가 있을 때에도 별다른 준비를 않다가 발표 전날에야 번개 같은 속도로 발표 자료를 완성해냈다.

그의 그러한 느긋함과 욕심도 근심도 별로 없는 천성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훨씬 더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을텐데,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운 순간들이 생겼다. 그는 스스로 나는 게을러서 문제야라고 말했지만,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아하는 것 같지 않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육아의 시절로 진입하자, 함께 의사결정을 하고 협동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불만이 더욱 커졌다. 하다못해 칫솔이나 딸랑이 하나 고르는 문제에서도 왜 그렇게 대강 결정해? 좀 더 꼼꼼하게 따져봐야지라며 밑도 끝도 없는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TCI에서는 남편과 내가 가진 신경생리학적 차이 때문에 이러한 성향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기질의 네 번째 차원인 인내력(PS)’에서 남편과 나는 각자 양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바 그래프로 나왔다. 개미처럼 바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주로 누워 쉬고 걸음걸이조차 굼뜨다가 사냥 직전에 재빠르게 몸을 던지는 사자 같은 사람이 있다. 헬스장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가기 쉬운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일 바로 근육이 만들어지는 일이 없다면 오늘 굳이 헬스장으로 걸음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남편과 내가 그 양자였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기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자, 좀 더 너그러이 남편의 느긋함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기질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이 TCI의 전제다. 그는 투지나 끈기 같은 것이 남들보다 적더라도, 자기 한계와 쉼이 필요할 때를 잘 알고 유연하게 힘을 쓰는 사람이었다. 몸이 피로한지, 들인 노력만큼 효율적으로 결과가 나오고 있는지 그때그때 잘 알아차렸다. 졸리거나 능률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면 컴퓨터를 끄고 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마감 직전 효율성이 극에 달할 때, 단시간에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실 끈기부지런함’, ‘최선을 다함과 같은 것은 사회가 바람직한 덕목으로 명명해놓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사람을 좀 더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분류하고 탓하게 된다.애초에 그 덕목을 쉽게 체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는 생각에 이르자, 꾸준히 해보라고, 왜 포기하냐고 쉽게 내뱉었던 잔소리를 스르륵 주워 담고 싶어졌다. “남편, 미안해.”

그러한 남편 곁에 있으면서 나도 조금은 변했다. 몸을 혹사해가며 쉴 틈 없이 강의 준비에 매달리다가도 남편을 따라 현관 밖으로 의자를 끌고 나와 뒤뜰에서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여행지에까지 가서도 발표 자료를 놓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자기 에너지를 실용적으로 쓰는 융통성 끝판왕 남편과 10년 넘게 같이 살다 보니 나도 내게 좀 더 여유를 주게 된 면이 있다.

 

남편과의 이러한 차이를 명확하고 또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에는 TCI의 덕이 크다. 스스로 검사를 통해 나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만큼, 호들갑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검사를 들이밀며 한 번 해보라 권한다. 특히 부부 간에 성격 차이로 갈등이 잦거나 아이와 기질 차이로 관계가 삐끗거리는 사람들에게 침을 튀기며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한다.

앞으로도 나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검사를 만나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상황마다, 문화마다, 대하는 사람마다 달라지기 마련인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의 성격을 또 다른 검사에서 어떻게 측정하고 설명해줄지 기대된다. 그곳에서 또 나를 이해하는 거울을,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렌즈를 갖게 될 것이다.


 

 

* 매달 5'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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