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바람이 불어오면 _ 백수정

2024.01.14 | 조회 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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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선선한 바람이 반갑게 느껴지는 여름의 초입, 나는 밤샘업무에 시달리는 10년차 방송작가였다. 방송 제작 시스템은 방송날짜에 맞춰 모든 일정이 빡빡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숨 쉴 틈이 없다. 그날도 촬영분을 보고 담당 피디가 편집을 할 수 있도록 편집구성안을 짜는 중이었다. 이미 전날 밤샘을 한 터라 심신이 지친 상태였는데 당시 남자친구에게서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신장 투석 부작용으로 며칠째 입원중이시긴 했지만 죽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도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에 달려간 모양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기에 당연히 가야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하필 이렇게 바쁠때..’ 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올라왔다. 급하게 써놓은 부분만 메일로 보내놓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남자친구를 위로했다. 그리고는 장례식장 옷차림 그대로 사무실로 와서 남은 분량을 마저 쓰고 담당 피디와 함께 편집본을 보았다. 오늘이 며칠째 밤샘인가 세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남자친구 아버지의 발인날은 더빙날이랑 겹쳤다. 아침까지 성우가 읽을 내레이션 원고가 나와야하는 상황이었다. 또 밤을 새서 원고를 넘기고 부랴부랴 국립현충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친구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뒤에서 남은 순서를 지켜보다 잠시 바람을 쐬고싶어 밖으로 나왔다. 벤치가 보이길래 앉았는데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셔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과 장례식장만 오가던 며칠, 촬영테잎과 노트북만 쳐다보던 며칠. 여름이 벌써 이만큼 왔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보니 햇빛에 짙은 초록의 나뭇잎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눈이 부셔서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 그 순간 아주 부드러운 바람이 내 귓가를 감싸안듯 스쳐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나지막히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할머니다!! 할머니가 내게 와주었구나”

잠시 휴식을 준 초록의 나뭇잎들과 바람이 마치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지금 내게 찾아와준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신비롭고 초월적인 체험의 순간이자 마음 깊은 위로의 순간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게 좀 특별한 분이셨다. 할머니도 여덟 명의 손주들 중 나를 가장 이뻐하셨고, 나는 어린 나이에도 어쩐지 할머니가 꺼내놓지 않는 마음까지 잘 헤아려졌다. 특히 여러 활동으로 바쁜 하나뿐인 딸(그러니까 내게는 엄마)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셨는데 정작 딸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삼키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른 할머니들과는 다르게 손주보다는 자식이 우선이었던 할머니를 보고 자란 나는 어렴풋이나마 부모자식간에도 쌍방통행하기 힘든 애정의 아이러니같은 것을 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것 같다. 항상 딸에 대한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가여웠다.

그런 할머니는 내가 방송작가 생활을 한지 3년쯤 됐을때 돌아가셨다. 내 입봉작 방송 일주일 전이었다. 촬영과 편집을 다 마치고 이제 원고만 쓰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할머니가 혼자 집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일하느라 바빠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던 때라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이 컸다. 하지만 내 입봉작의 원고 더빙날이 얄궂게도 할머니 발인날이랑 겹쳤다. 입봉작이라 여유있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사실 뒤로 미뤄도 방송 일정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는데 이제 막 입봉을 하려는 입장이다 보니 그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대표님도 먼저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발인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날 밤새 좁은 편집실에 앉아 원고를 썼다. 일의 무정함,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는 황망함. 나도 결국 엄마처럼 할머니를 외롭게 했다는 죄책감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킨 상태로 내 생애 첫 원고를 썼다.

일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그때가 내게 상처로 남은 것일까. 그래서 남자친구 아버지의 발인날 할머니가 괜찮다고 내게 위로를 건네려고 바람과 함께 찾아온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나뭇잎이 흩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할머니를 느꼈던 그 체험 이후 나는 산책을 하다가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귓가를 감싸면 몸과 마음이 한껏 치유받는 느낌을 받는다.

 

* 글쓴이 소개 - 백수정

13년간 KBS 무한지대큐, EBS 어머니전, EBS 하나뿐인 지구 등 교양다큐멘터리 방송작가로 일하다, 출산 후 아이 키우는 매력에 흠뻑 빠져 자발적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올해,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에 매료되어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력적인 세계를 찾아다니며 몰입하는 사람입니다.

블로그 - https://blog.naver.com/douli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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