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500일의 썸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애 영화는 스타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들은 사랑받는 동시에 오해받는다. 대중은 자신의 시각대로 그들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외관을 가지고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아마도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투영해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어떤 장르의 영화를 보는 순간에나 우리는 각자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연애만큼 우리의 시야를, 기억을, 영화를 보는 관점을 강한 인력으로 잡아끄는 경험이 또 있을까? 그래서 때로 연애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는 각자의 연애담을 성토하는 난장판이 되기도 한다.
여기 남부럽지 않게 많은 오해를 받는 영화 한 편이 있다. <500일의 썸머>(2010) 이야기다. 이 작품을 둘러싼 무수한 말들은 <500일의 썸머>가 얼마나 예리하게 사랑의 한 단면을 포착하고 건드렸는지를 방증한다. 처음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며 펜을 들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이 또 다른 오해 하나를 얹는 과정일 뿐임을 깨닫는다. 사랑에 대한 영화를 투명하게 보고 쓰는 일이 과연 가능키나 할까. 여기 덧붙이는 글이 영화를 꿰뚫을 수 없겠으나 그것과 다정하게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청명한 산에 난 오솔길을 지나가는 이들이 염원을 담아 쌓아 둔 작은 돌탑처럼.
<500일의 썸머>에는 두 유형의 연애인(戀愛人, 연애하는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톰(조셉 고든 레빗).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 또 하나는 썸머(주이 디샤넬). 사랑을 믿지 않으나 적당한 관계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다.
톰은 썸머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하고 그녀와 데이트하며, 함께 할 미래를 꿈꾼다. 특히 톰을 연기한 조셉 고든 레빗은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이 일희일비하는 순간들을 아주 맛깔나게 연기한다. 이 영화가 연애 영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데는 그의 연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유명한 장면은 이케아에서의 데이트 시퀀스다. 그들은 가구 진열장에서 신혼부부를 흉내 내며 논다. 영락없이 귀여운 커플의 한 때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되돌아보면 꽤나 슬프다. 썸머에게 이 시간은 단순히 현재의 즐거운 한때일 뿐이지만, 톰에게 이 순간은 현재이자 함께 하고픈 미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놓인 간극은 아직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관계가 무르익을 어느 순간에, 간극은 기어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느 백주대낮에 얼굴을 뻔뻔히 쳐들고 다정한 두 연인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썸머는 반복되는 갈등에 톰에게 이별을 요구한다. "연애는 사실 큰 스트레스"라는 지인의 농담이 기억난다. 미안함에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못하지만 사실 내밀한 관계는 늘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감수하고 갈등을 마주 보며 간극을 좁혀가는 이유는 관계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달콤한 연애의 잔인한 진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고독한 노력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귀하다. 하지만 이 영화와 관련해 한 가지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썸머와 톰 사이의 온도차에 대한 어떤 해석이다. 썸머는 사랑을 가벼이 여기고 톰은 진실하다는. 이 둘의 차이는 단순하게 요약하기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을 떠올려보자. 마음 다해 사랑한 관계가 깨어지자 톰은 썸머에게 "너의 말이 맞았다"고 말한다. 사랑은 환상일 뿐이라고. 이 모습은 처음 톰을 만났을 때 썸머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랑 앞에서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썸머의 태도와.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썸머는 도리어 약간 부드러워진 모습이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계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이 피어나는 '봄', 열정적인 사랑에 뜨겁게 몸을 던지는 '여름', 열정은 지나갔지만 선선한 '가을'과 온몸을 얼게 하는 차가운 '겨울'. 안타깝게도 톰과 썸머는 서로 다른 사랑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처음 만남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각자의 계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500일의 썸머>는 은밀하게 얘기한다. 때로 연애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끼어들고 우리는 그것을 타이밍, 운명 등 많은 단어로 표현하려 애쓴다. 하지만 어떤 말로 그것을 표현하든, 어떤 결과가 도래하든, 중요한 건 그것을 존중하며 마음을 다하는 일 아닐까. 나는 <500일의 썸머>가 뜨거운 여름을 보낸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계절의 간극에 아픔을 겪지만 끝내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에 톰은 썸머에 이어 어텀(autumn, 가을)을 만난다. 그가 이번에는 같은 계절을 보내는 여자와 행복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을까. 또 한 명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썸머'. 이제는 결혼할 사람을 만났다는 그녀가 차가운 겨울을 지나 어디선가 포근한 봄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비록 우리의 계절이 다를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해도, 아름답게 순환하는 사랑의 사계(四季)가 있다는 점은 여전히 삶의 축복이다.
[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브런치 블로그 - https://brunch.co.kr/@comeandplay
연애 영화에 관한 모임 운영 - netflix-salon.com/meetups/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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