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내가 그 말을 왜 했지?” 세수를 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농담이라고 꺼낸 말이 맥락상 부적절하기만 하고 웃기는 것에는 처참히 실패했을 때,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의 아픈 부분을 건드렸을 때, 중요한 발표를 버벅거리다 기어이 망쳤을 때, 그 순간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왔다.
집에 오는 길에 내가 했던 말실수나 어리숙한 행동이 훅 하고 떠오르면 그 시간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나를 후벼팠다. ‘나는 왜 이렇게 서툰걸까’, '나는 앞으로도 매번 이런 식이지 않을까', '왜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할까'하는 생각에까지 이른 날은 더욱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이러한 지나간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면 반추(rumination)에 가깝다. 소나 염소 같은 동물이 먹은 음식을 다시 게워내어 씹는 것을 반추 행동이라고 한다. 심리과정에서의 반추는 부정적인 과거 사건을 되새김질하듯 곱씹어보는 것이다. 그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우리를 그 시점으로 순간 이동시킨다. 우리는 무방비상태에서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상황 한복판으로 소환되어버린다.
사실 우리 뇌는 부정적인 기억에 특화되어 있다. 편도체와 해마는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기억을 감정과 연결지어 저장하는데, 이 때 감정의 강도가 클수록 기억은 더 오래 저장되며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이 특히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다. 결국 부정적인 기억이 더 오래 더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추는 뇌가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위협받을 때 뇌는 더 강렬한 신호를 내뿜는다.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따라오는 감정이 거세다면 그만큼 그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발표를 성공적으로 잘 해내고 싶은 기대가 높을수록,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바람이 클수록, 사람들에게 세련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일일수록 마음은 더욱 요동친다.
‘헉’하고 내 일상에 일시정지 버튼을 종종 누르던 기억은 대개 수치심이나 죄책감이라는 감정과 함께 찾아왔다. 신입 시절 출장 가는 선배를 돕겠다고 자원해서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 먼 지방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회의 내내 상황 파악이 도저히 어려웠던 나는 질문 세례 속에서도 아무런 답변도 거들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날의 기억이 두고두고 고통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따라가겠다고 자원하지 말걸’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 거센 감정의 파도 아래에 유능한 직원이 되지 못한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 선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만큼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픈 바람이 내겐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애초에 부정적인 기억만 남긴 출장을 가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혹은 앞으로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그런 낯선 일은 시도하지 않는 게 맞는걸까?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에서는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기억에서 벗어나려 애쓰거나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회피할수록 그것에 더욱 사로잡히고 만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우리가 마주하기 겁내는 감정이나 무서워하는 상황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때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용전념치료의 치료 목표는 이러한 부정적인 기억이나 생각이 덜 떠오르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은 부정적 정서 상태일 때가 기본값에 가까울 만큼, 수시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찾아와 들어앉는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끌어안고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로 치료 효과를 가늠한다. 날카롭고 가슴시린 기억 속에서 충분히 불안한 채로 살아가고, 그러면서 바라는 삶의 방향대로 걸어가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새로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지역 소그룹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모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몇 주 미루다가 급히 나가보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아이는 가기 싫다고 몇 번 이야기하더니 물었다. “엄마, 그냥 우리끼리 집에서 저녁 먹으면 안돼?” 그제서야 나도 긴장했던 마음을 돌아보았다. 나 역시 집에서 가족끼리 있는 게 훨씬 편하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지, 그들끼리 친해서 내가 끼어들 공간이 없으면 어쩌지, 이방인처럼 있다가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들이 내게도 있었다. 실은 예전 교회에서 영어의 벽 때문에 생각만큼 토론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기억 때문에 더욱 움츠러들기도 했다.
그 모든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로 내가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한 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엄마도 사실은 집에 있는 게 더 편하고 낯선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건 긴장되는 일이야.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엄마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고 새 교회에 잘 적응하고 싶어.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여러 걱정이 들지만 한 번 가 보는거야. 걱정된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거든.” 아이에게 하는 말은 실은 나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고통스러운 실패의 기억을 하나 더 갖게 될 수도 있다. 모임에서 했던 말이나 나의 태도를 떠올리며 반추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위험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한 발을 옮기는 이 과정 자체가 결국은 나를 내가 바라는 존재로 만들어 갈거라 믿는다. 마음에 긴장감으로 가득 찰 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아래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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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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