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다니던 회사에서 판권을 두고 싸운(?) 적이 있다. 박노자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 재쇄를 진행해야 했다. 퇴사한 선배 편집자가 만든 책이다. 책을 살펴봤는데 보도자료가 아주 멋졌다. 편집자가 책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 책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편집자 개인의 개성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보도자료였다. 판권에서 편집자의 이름을 유심히 살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재쇄를 찍게 되었으니 판권에서 담당편집자의 이름을 빼고 대신 내 이름을 넣으라고 했다. 으읭? 나는 의아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자가 아닌데요? 그건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저는 제 이름을 안 넣고 싶은데요? 나는 이 책을 만들었던 선배 편집자에 대해 존중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판권에 남겨두고 싶었고,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 책을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으니까.
퇴사한 직원의 이름은 판권에서 뺀다. 나의 사수는 그게 회사의 방침이라고 했다. 너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지금은 상황이 복잡하니 일단 넘어가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당시 나는 입사한 지 몇 개월이 안 된 신참이어서 그다지 발언권도 없었다.
그리고 한 1년쯤 지났을까. 다시 판권 얘기를 꺼냈다. 편집부 회의를 통해 책을 만들었던 담당편집자의 이름, 외주 편집자의 이름까지 넣기로 했다. 당연히 재쇄를 찍더라도 책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남게 된다.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최근 출판계의 ‘트렌드’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몇 개월이 지나, 다시 회사의 방침이 바뀌었다. 퇴사한 직원의 이름은 뺀다. 내 의견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게 회사의 ‘방침’에 따를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 책을 만든 사람이 아닌데 그저 재쇄를 담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편집자의 이름을 넣는 것은 그냥 ‘팩트’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회사는 왜 그런 방침을 내렸을까. 그게 뭐라고. 판권에 책을 만든 편집자의 이름을 넣어주는 게,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아주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게 회사의 방향이나 철학까지도 결정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편집자는 그저 회사라는 조직의 작은 나사를 담당하는 ‘조직원’일 뿐이고, 이 조직 안에서 이루어진 일은 ‘편집자’의 것이라기보다 ‘회사’의 것이므로 회사를 떠난 사람에게 이름을 남길 자리 따윈 없다는 것이 회사의 생각이었으리라.
편집자가 뭐 대단한 것이겠는가. 편집자도 회사의 명에 따라야 하는 회사원일 뿐이다. 나는 다만 그런 방침이 ‘조직 전략적’으로 옳은 일인가 혹은 좋은 일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판권이란 편집자에게(혹은 마케터에게, 디자이너에게, 제작자에게) 이 책이 ‘나의 책’이라는 표식 같은 것이다. 내가 이 책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애정이든 애증이든 증오든, 책을 만들면서 무슨 감정을 느꼈든 편집자는 내가 만든 책을 ‘나의 것’으로 여긴다. 그 정도의 크레딧도 회사에서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게 회사로서도 옳은 전략일까?
정지우 작가의 책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만들고 있을 당시에, 작가가 내게 이런 제안을 해온 적이 있다. 책 표지에 작가 이름과 나란히 편집자의 이름을 넣자는 것이었다. 책을 마감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작가와 짧은 통화를 나누었고, 나는 작가의 속 깊은 배려에 그저 울컥하고 말았다. 원고는 온전히 작가의 것이다. 그러나 책은, 작가 혼자만의 것일 수 없다. 작가와 편집자가 함께 만든 것이다. 작가는 내게 바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회사의 방침이 작가의 생각과는 절대 일치점을 찾을 수 없으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작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내가 책 표지에 이름을 넣을 만큼, 그렇게 대단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설령 회사 방침이 다른 방향이었을지라도, 나는 작가의 그 고마운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기획을 했건 편집을 했건, 지금 내가 만들었던 책들에 내 이름은 없다. 정지우 작가의 책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편집자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내가 만든 책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씁쓸한 마음이 아니 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든 책들에 내 흔적이 한 줌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글쓴이 고우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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