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해가 식어가는 어느 오후,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 가족은 해안가를 따라 달렸다. 저 멀리 좁고 구불거리는 길 위로 코크(Cork City) 시의 기차역에서 코브(Cobh) 항구까지 연결된 버스가 큰 덩치에도 솜씨 좋게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몸속 가득 집어넣었다. 동네마다 발행되는 지역 신문에서 코브(Cobh)에 지어진 고급 주택들은 유럽 전역에서 폐와 관련된 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머물기 위해지어 둔 별장들이 많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열 길 물속의 항구
유럽을 여행하면서, 언제나 설레는 순간은 저 멀리서 대성당의 십자가 첨탑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코브는 부산의 바닷가 마을처럼 언덕길을 따라 집들이 이어져 있는데, 대성당 역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멀리에서도 금방 찾을 수 있다. 길을 따라 코브로 들어가는 길에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이 말했다. “저런 라이너(Liner)야.” 커다란 크루즈를 라이너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의 앞마당 바다에 엄청난 규모의 배가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깊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항구는 작지만 수심이 깊어서 큰 배들이 마을 앞까지 다가올 수 있어서 거의 매주 여행객들이 항구에 내려서 잠시 쉬거나 코크시 여행을 하곤 해. 코브(Cobh)는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항구이기도 해.
언덕길을 따라 좁은 계단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언덕에 있는 코브 대성당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때마침 3시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 안은 늦은 오후의 햇빛이 오색찬란한 색을 입으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을 나와 성당 앞마당에서 코브항구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성당 옆으로 구불구불 난 계단을 이용해서 항구 쪽으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옆에 서로 벽을 맞대고 붙어있는 여러 채의 집들이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고 바다를 향해 있었다.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크루즈에 놀라며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폐관이 30분도 남지 않아서 포기하고 대신에 여행센터에 작은 전시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전시관 안에는 타이타닉 호의 티켓과 내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타이타닉 호를 사진으로 남겼던 브라운 신부
“1912년도에 일어난 사고인데, 타이타닉 호에 관한 사진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네. 타이타닉 호의 전속 사진사가 있었나?” 나의 말에 제임스가 대답했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아일랜드에 도착한 뒤 최종적으로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배였어. 1912년에 가톨릭 신부였던 브라운 신부는 삼촌에게서 이 타이타닉호를 타고 영국에서 아일랜드까지 여행하는 티켓을 선물 받았지.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브라운 신부는 영국에서 승선한 뒤 타이타닉 호 곳곳의 사진과 1,2,3등석의 사람들과 선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모습을 모두 사진에 담았다고 해.
그는 식당에서 백만장자 부부와 식사를 하며 친해졌는데, 이 부부가 브라운 신부에게 미국 뉴욕까지 가는 티켓을 선물하겠다고 제안을 했었다는군. 그래서 신부는 수도원장에게 허락을 구하며 전보를 보냈는데,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딱 한 줄이었대. ‘당장 내리시오(Get off that ship.)!’
브라운 신부는 아쉽지만 미국까지 가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시에서 내려 수도회가 있는 더블린으로 돌아갔다고 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 신부는 타이타닉호의 침몰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신문사 등에 사진을 보냈는데, 신부가 찍은 모든 사진을 보낸 것은 아니었어. 아무튼 당시에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대해 여러 매체들이 브라운 신부의 생생한 사진을 사용하고자 연락을 해 왔는데, 그 중에서도 당시 유명한 필름 회사였던 코닥에서 자신들의 매거진에 사진을 기고하길 부탁하면서 평생 동안 사용할 필름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고도 해.”
가라앉은 배,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나는 전시된 사진 속의 인물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계 최고 규모의 값비싼 배가 단 한번 운행을 하고 영원히 바다속으로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타이타닉 호와 함께 영원히 가라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이름 모를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알려진 바로는 타이타닉에는 약 2200명의 사람이 승선해 있었고,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약 1700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물속으로 사라져 간 목숨을 안타깝게 여기며 가슴을 치며 슬퍼했을 그들의 가족의 수를 생각하면 대서양의 깊은 바다속으로 사라진 삶은 어쩌면 1700개 그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사고에서 기사회생한 생존자는 모두 약 750여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고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불문율처럼 여성과 어린이들을 먼저 보트에 태운 아버지와 남편들의 마지막 모습은 생존자들의 가슴에 또렷하게 남아있었고, 그 기억은 훗날 그들이 남긴 회고를 통해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코브 항의 바다를 바라보며, 10년 전 4월 깊고 차가운 바다속으로 들어간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 339명을 포함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항했던 세월호는 다음 날 아침 완전히 침몰되어 172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304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올 해로 딱 10년. 꽃잎처럼 저 하늘로 날아간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변해버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들의 삶은 여전히 까만 바다속에 침잠해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을 떠나 아일랜드에 살면서 나는 언제나 주파수를 한국에 맞추어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마음만 그럴 뿐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던 세월호 분향소에도 가지 못했고, 또 개인적으로 몇 년 전에는 오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그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깊고 검은 바다 앞에서 동포의 슬픔을 애도하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타는 듯 붉은 노을이 하늘에서 그 색을 점점 진하게 펼쳐 놓을 때, 우리 가족은 타이타닉 호의 선착장으로 사용했던 곳에 차려진 커피숍에 앉아서 차 한 잔을 마셨다. 여행의 끝은 대개 흥분과 만족감 끝에 찾아오는 피곤함이 기분을 좋게 하는데, 오늘의 여행은 알 수 없는 슬픔과 애잔함으로 피곤함마저 사치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 바다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들어 남편을 바라보며 1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사고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내게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성당으로 올라가서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가는 게 어떨까?”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제안해 준 남편의 사려 깊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까 내려왔던 좁은 골목의 계단을 다시 올라가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잠시 자리에 앉아서 기도했다. 아이들과 또 아이들의 가족들을 위해서.
* 아일랜드에 사는 한국인의 로컬 아일랜드 여행기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한 뒤 10년 동안 아일랜드 코크(Cork)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잘 알려진 관광지 대신 이야기가 있는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를 여행하는 세 가족의 여행기입니다. 특히 아일랜드 영화의 무대가 된 장소를 여행하며, 그곳과 관련된 인물과 숨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글쓴이 - 도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만난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올 해로 10년째 아일랜드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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