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일 때문에 뭣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일로 마시는 거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마셔서 그런지 별로 취한 적도 없다. 폭탄주를 여러 잔 마시던, 새벽까지 날을 새며 마시던 필름이 끊긴 적도 없고 남의 도움을 받은 적도 별로 없다. 그래서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주량이 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나는 술이 센 편은 아니다. 알콜이 코 끝을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시뻘게진다. 편한 자리에서는 얼마 못 마시고 금새 취해버리곤 한다. 특히 맥주와 와인에 아주 취약해서, 맥주는 반 캔, 와인도 반 잔 정도면 충분히 취한다. 기분 좋게 취한다거나 술기운이 올라오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속이 뒤집히고 심하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바닥에 주저 앉거나 쓰러지기도 한다. 술이 세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다.
술에 대한 나의 이런 이중성은 어쩌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어머니는 술을 정말 잘 드셨고 좋아하시기도 한 반면, 아버지는 맥주 반 잔에도 만취하는 주량이었고 애초에 술을 즐기지도 않으셨다. 어머니가 동네 친구들과 맥주 파티를 하면 아버지는 술자리에 앉아 콜라만 드시다가 자리가 파하면 기분좋게 술이 오른 어머니와 함께 귀가 하시곤 했다. 나는 두 분의 유전자 두 벌을 모두 물려받아, 회사에서 술을 마실 때는 어머니의 기질이 발현되고, 편하게 마실 때는 아버지를 닮는 건가 싶다.
어쨌든, 어머니 덕분인지, 정신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것은 회사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직장 생활 중 꽤 긴 시간을 고객사를 상대하는 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고객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외주사 파트너들을 평가 했는데, 프로젝트 초기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회식 자리에서 주량으로 테스트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코가 삐뚫어질 때까지 술을 먹인 후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인데, 나는 주는 술을 한 잔도 거절 않고 다 먹은 후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챙겨서 귀가 시키고 다음 날 아침에 멀쩡한 모습으로 깔끔하게 정장 차려입고 제일 먼저 출근해서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숙취 해소제나 커피를 나눠주곤 했기 때문에, 대게는 음주 테스트를 높은 점수로 통과하곤 했다. 내게는 술 또한 일이었다.
그렇게 술 마시는 재미도 모르고, 꼭 마셔야 하는 자리에서는 억지로 들이붓다가, 한참 나이들고 나서야 나한테 맞는 술을 만났다. 첫 한 모금 마셨는데 그 순간 바로 이거구나 하고 알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늦게서야 만났니, 그래 이제라도 알게되어 고맙다, 그랬다.
그 때 알게된 술은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Scotch whisky)다. 그 중에서도 싱글 캐스크, 캐스크 스트렝스의 독주였다.
스카치 위스키: 스코틀랜드에서 제조되는 위스키
싱글 몰트: 몰트(싹을 틔운 보리) 만을 이용해서 단일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
싱글 캐스크: 캐스크는 술을 숙성시키는 통을 말한다. 싱글 캐스크는 여러 통의 술을 섞지 않고 하나의 통에서 나온 술로 만든 위스키를 말한다.
캐스크 스트렝스: 술을 숙성시키는 캐스크에서 나온 원액을 물로 희석하지 않고 원액 그대로 병에 담은 위스키를 말한다.
싱글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SMWS): 위스키를 함께 즐기는 모임. 멤버쉽 형태로 운영되며 모임에서 캐스크를 구입하여 함께 즐기고 해당 캐스크에 적절한 별명도 붙여준다. (위의 이미지에서는 full of shy promise)
Miltonduff: 유명한 싱글 몰트 중 하나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위스키인 Valentine을 만드는 핵심 원액이다. 발렌타인의 화사한 향을 담당한다.
그렇게 친구같은 술을 만나고, 이제는 술을 즐길 뿐더러, 술을 벗삼아 혼자서도 꽉찬 시간을 보낼 줄도 알게 되었다. 휘영청하게 밝은 달이 외롭게 뜬 줄만 알았더니, 짙푸른 그 밤하늘이 사실은 벅차게 가득찼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그 색도, 그 공기도, 그 고요함도.
나는 어쩌면,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이런 술 같은 친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문득 딱 마주쳤는데 아 이 사람이구나 서로 알아보게 되는 친구, 밝은 날, 매일, 일상을 함께 하지 않지만, 긴 생각의 끝에는 가닿는 사람, 어쩌다 가끔 만나도 오래간만 인 것 같지 않게 툭 터놓게 되는 사람, 잊고 지냈던 감정들 오래된 추억들을 알딸딸하게 끄집어 내는 사람. 잠깐 열리는 다른 세상으로 향한 문같은 친구. 그림자같이 숨어있는 좁은 골목길 입구 같은 친구. 그런 것도 참 좋다 생각 했다.
내일은 또 한 잔 해야지. 첫 눈이 이리 내리는데, 달빛 아래.
* 이상하지 않은 나라의 알렉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토끼굴에 쏙 빠지면서 이상한 나라로 떠나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된다. 알렉스는 최근 여유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느끼게 되면서 문득,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이상하지 않은 나라 속에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특별한 순간들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 글쓴이 - 알렉스
외국계 기업을 다니며 회사에서 쓰던 영어 이름이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고, 최근 건강 문제로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백수이자 동네 아줌마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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