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 뭐라고 생각해? 저녁으로 시킨 피자를 먹으려는데, 케이가 물었다. 엄청 어려운 질문인데. 나는 핫소스를 뜯으며 그에게도 뿌릴 것인지 물었다. 그는 절대 뿌리지 말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이 그러더라고, '악'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종교적인 질문인가, 그래서 목사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케이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은 피자를 한 입 베어물었다. 나도 핫소스를 뿌린 피자를 먹었다. 입 안의 내용물이 사라질 때까지 탁자 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게, '의'를 잘못 사용하는 게 '악'이래. 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의인들은 사실 다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래. 정당하게 분노하고, 올바른 곳에 분노를 표현한 사람들은 의인이라고 부른다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똑같은 감정을 가져도 악인이 된다면서, 감정 자체에 부정과 긍정이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
제법 그럴 듯 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케이는 동의를 구하는 듯 한 번 물어보고, 그런데, 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보니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게, 훨씬 어렵게 느껴지더라고. 케이는 금세 피자 한 조각을 다 먹어버리고는 두 번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밥 먹는 속도가 빨랐다. 나는 손에 남아있는 조각을 마저 입에 넣고, 자신이 집어 갈 피자에 핫소스를 뿌렸다.
아예 화를 내지 않는 것보다 올바르게 화를 내는 게 더 어렵다는 건가. 맞아. 그는 피자와 함께 사온 콜라를 자신의 컵에 부었다. 하얀 거품이 소리를 내며 부풀어오르다 이내 가라앉았다. 분노도 원망도 슬픔도, 마냥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니까. 거품이 사라진 콜라가 오늘따라 유독 검게 보였다. 올바른 쓰임을 찾지 못한 감정도 죄가 될까?
나는 목이 메여 페트병 채로 콜라를 몇 모금 마셨다. 목이 조금 따가웠지만 기분 좋은 청량감이 있었다. 죄가 되겠지. 잔인한 말이겠지만, 이라고, 내가 덧붙였다. 역시 그렇겠지? 잔인한 말이라도, 라고, 케이가 덧붙였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걸까. 화가 나서,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감정을 사용했을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듯 그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책을 쓰면서, 혼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분노는 분노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분노를 지연하고, 여과할 수록, 그 속에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이 있음을 느꼈다. 나는 화가 났지만, 동시에 슬펐고, 애틋했고, 어느샌가 흐르던 눈물만큼이나 따스한 애정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건 너를 위한 글이기도 했어. 나는 케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를 화나 게 만든 세상 속에서, 네가 죄를 짓지 않았으면 했어. 올바른 쓰임을 찾지 못하는 감정들 속에서, 너를 구하고 싶었어. 그건 과분한 생각이었을까. 어쩌면 오만이나 자만 같은, 또다른 형태의 '악'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천국이 없어도, 나는 이렇게 살았을 거라고.
남은 건 내일 아침에 먹자. 세 조각 째 피자를 마저 먹은 케이가 말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세 조각을 먹은 나는 동의를 표현 후, 그런데, 라고 말을 이었다. 너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아니. 그는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왜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거? 케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컵에 남아있던 콜라를 마셨다. 그냥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야지 싶어서.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게 제일 무서운 거 아니겠어?
우리는 남은 피자를 덜어내고 탁자를 치웠다. 얼마 남지 않은 콜라는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으면서, 나는 탄산이 세어나오느 듯 피식, 하고 웃었다. 늘 그랬다. 케이는 언제나 나보다 빨랐다. 너는 이미, 자신을 구했다. 그가 작업 중이던 그림을 마무리하러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책상에 앉았다. 저마다의 믿음만큼,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을거라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개수만큼 저마다의 구원이 있을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창문 너머 반짝이는 불빛이 누군가의 인기척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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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는 글쓰기' 글쓴이 - 허태준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라는 책으로 담았습니다. 지금은 부산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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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haso
[올바른 쓰임을 찾지 못한 감정도 죄가 될까? ... 죄가 되겠지. 잔인한 말이겠지만, ]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되뇌이게 되네요. 그리고 저도 착한 사람 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저에게만은 좋은 사람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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