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집 여기저기에 주택복권이 나뒹굴었다. 빚에 허덕이던 부모님은 주택복권을 통해 자가를 마련하고 싶어 했다. 주택복권을 자주 샀으나 행운이 따라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택복권은 최초의 추첨식 정기복권이었다. 1969년에 처음으로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구령소리가 전국으로 힘차게 전파됐고, 사람들은 자신의 복권이 당첨되기를 숨차게 빌었다. 주택복권은 자기 집을 장만하기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에게 목돈을 지급했다.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택복권을 샀고, 그 가운데 한줌의 사람들이 일확천금했다.
주택복권은 2006년 4월을 끝으로 37년의 대장정을 끝냈다. 집값이 하도 올라 주택복권 당첨금으로는 번듯한 집 한 채 장만하기에도 빠듯해진 데다 2002년 12월에 로또가 국내에 도입되면서 주택복권의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만 주택복권을 사던 시절이나 로또를 사는 지금이나 실상 별로 달라진 것 없다. 한국은 예전보다 훨씬 부유해졌어도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노력한다고 자신의 처지가 바뀌기는커녕 갈수록 계층이 공고해지는 현실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이번 생에 다른 수저로 밥을 먹는 일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구원하기 어렵기에 초월자의 구원을 기다리게 된다. 신이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때 복권의 신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 간절히 숭배를 드리면 복권의 신은 몇몇의 신도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돈벼락을 내려주신다. 부지런히 일하고 알뜰히 아껴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돈이 기적처럼 주어진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공물을 바치지만,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신의 침묵에 좌절하지 않고 언젠가는 알아주실 거라면서 그들은 복권의 신에게 매주 헌금을 바친다. 복권당첨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복권판매점은 복권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순례하며 예배드리는 성소이다. 눈여겨보면 거리 곳곳에 복권의 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복권을 파는 데 그리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인지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새에도 복권판매점이 들어서있다. 복권판매점의 공간이 조금 넓으면 한편엔 빙과류나 과자도 같이 판다. 내가 사는 동네엔 최근에 부동산중개소 한쪽에 복권판매점이 들어섰다. 들어가 보니 부동산중개를 해주는 사무실 앞쪽에 복권을 판매하는 분이 칸막이를 치고 복권을 팔고 있었다. 복을 얻고자, 집을 사고자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자주 가는 채소가게가 있다. 오직 현금거래만 가능하고, 박리다매로 이문을 남기는 곳이다. 일반 가게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품질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치솟는 물가에 반찬값을 한푼이라도 아끼고픈 서민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코로나19가 염려스럽지만, 500원이라도 더 싸게 사고픈 마음에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한다. 서민에게 혜택을 주면서 돈을 그러모은 이 집 주인은 바로 옆에다 2호점을 차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됐고, 분당에 집을 두 채나 샀다는 풍문이 떠돈다.
이 채소가게 옆에 복권판매점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두 곳을 같이 이용할 것이다. 반찬값을 아껴 모은 돈으로 복권을 산다. 복권 살 돈으로 차라리 채소나 과일을 더 사먹는 게 합리적인 행위 같지만, 인간은 꼭 합리적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요행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하루는 로또를 사고 있는데, 모녀가 복권판매점에 들어왔다. 둘은 각자 자리를 잡더니 한참 동안 골똘히 번호조합을 구상했다. 고민하면 할수록 1등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은 채 엄숙한 분위기에서 번호를 골랐다. 절실함이 몸에서 뿜어져 나기 때문에 저절로 그들의 로또가 당첨되길 바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또 어떤 날엔 추적자가 빗속을 뚫고 쫓아올 것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렸는데, 복권판매점 앞 도로에 커다란 차가 비상등을 켠 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좋아 보이는 큼직한 고급차였다. 6차선 사거리 모퉁이에 복권판매점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렇게 정차하면 도로정체가 발생한다는 걸 깜빡했는지 차는 깜빡이를 켠 채 떡하니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로또를 사가지고는 서둘러 나왔다. 자신이 산 로또의 번호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들여다보다가 허둥지둥 차에 올라타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저 차를 몰 정도면 경제사정이 그리 쪼들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도 로또를 구매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빚을 잔뜩 낸 뒤 자신의 형편에 맞지 않게 씀씀이가 헤픈 사람인지도 몰랐다. 남들 앞에선 있는 척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의 영주일 수도 있었다. 흥청망청 살다가 파멸하는 사람들이 현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설사 부자더라도 더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세상이다. 오늘날 부유함은 지고선이자 인생의 유일한 목표처럼 되고 있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 같은 사회이고, 부자가 되어도 더 큰 부자가 되고자 손수 자기 등허리에다 채찍질하는 분위기이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더 많은 돈을 원한다. 나 역시 처음으로 산 로또를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지어졌고, 큰돈이 생기면 뭐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지루하고 외롭고 괴로운 날을 견딜 수 있었다.
<로또를 향해> 글쓴이 - 이인
인문학 강사이자 작가.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고독을 건너는 방법>, <남자를 밝힌다> 등등 여러 책을 저술했고, 많은 곳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산뜻한 글을 쓰려고 해요. 언젠가 그대와 반갑게 뵐 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싱싱하고 생생하게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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