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도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사실 오늘도 스스로 빛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흰색 셔츠를 다려입고 올까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옷을 입더라도 빛날 방도가 있겠습니다. 그저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빛나는 시간을 자주 보내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계속 빛나면 광인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태양도 하루의 절반만 빛나는데 하물며 인간이 그럴 방도가 있을까 싶습니다. 빛나는 하루를 만드는 비밀을 안다면 저는 여기에 없고 어딘가에서 발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느낌을 알고 있죠. 잠깐이지만 조금씩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 감각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조금은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당신은 언제 빛나는 하루를 보냈다고 느끼는지 궁하네요. 돌이켜보면 저의 경우에는 오랜 친구들과 추억이 만들 때 빛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술 마시고 담배를 같이 하면 괜찮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또 조금 빛나는 것 같아요. 혼자 담배만 피우면 뭔가 숨통은 트입니다만 빛나는 느낌은 아닌 것 같아요. 혼자 술을 마셔도 빛나는 느낌은 아닙니다. 빛이 있되 조금은 아련한 느낌이죠. 드라마를 보면 어떤가요? 시간을 잘 가는데, 제가 빛난다고 느낌은 적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끝나면 허무함이 밀려옵니다. 다만, 드라마를 보면 몰입의 즐거움이 있고 타인과 관계에서 할 말이 생기기 때문에 유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여행을 갈 때는 어떨까요? 얼마 전에 저희 카페 직원이 일본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여자친구가 있지만 혼자 다녀온 여행이었는데, 후쿠오카 쪽으로 여행을 갔데요. 거기서 맛집도 다니고 카페도 다니고 혼자서 무알콜 맥주도 마시고 그랬대요. 오랜만에 담배도 피우면서요. 카페에 복귀해서 짧은 소감을 전하는데, 이런 게 인생 아닐까 하며 소감을 전하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오!’ 했습니다. 분명히 빛나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말하는 순간도 표정이 참 좋았어요. 저에게 사진도 보여주고 초콜릿도 세 봉지나 사 왔더군요. 저도 최대한 주의 깊게 들었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낯선 곳을 가면 그곳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그 공간과 진지하게 관계하는 듯합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도 어떤 진지한 관계를 하고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도 많이 받습니다. 자기만 아는 에피소드가 생기고, 여행지에서 가져온 물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 어떨까요. 여행의 효용은 더 높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쩌면 빛난다는 느낌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에서 오고, 그 의미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때 더 오래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합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잘 보내야지 빛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확실하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빛이 나려면 시간을 잘 태워야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태울 것이라면, 최초의 불꽃은 저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 의지를 저도 어떻게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라이터와 달라서 딱 돌렸을 때 불꽃이 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날은 장판과 몸이 일체가 되어서 도리없이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그런 날이 길어질 때도 있죠. 이유인 즉 사람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괜찮으면 작은 불꽃에도 불이 붙습니다. 환경은 지지해주는 사람(존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제가 아직은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 저를 인정해주는 사람이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정에 집착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도 사실은 사회가 주입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오면서 우리가 들었던 많이 이야기에는 그런 암시가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괜찮다고 말해주는 모종의 프레임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특별하다는 도구라고 여겨집니다. (어디까지나 저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어서 밥맛이 없는데 밥을 먹고 같은 길을 반복해서 산책한단 말이에요. 내가 가지고 온 이야기, 내가 벌어온 적은 돈 그런 것에 반응해주는 그녀가 고맙습니다. 그래서 고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장사가 안되어도 카페를 열고, 손님이 없어서 앉아서 기리는 시간을 감내합니다. 막막한데, 살아지는 그런 순간이죠. 그런 순간은 어둡다기보다 빛나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나의 애씀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또 제 기분이 좋단 말이죠. 저는 못 느껴도 그 사람이 느껴, 그러면 또 행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태우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그 존재가 이 막막한 세상에서 산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제 마음의 불씨가 약하더라도, 빛나는 시간을 보냅니다.
좋은 사람을 찾기 어렵지만 찾게 되면 그것 때문에 살아집니다. 사람은 평생 그런 관계 덕분에 빛나는 시간을 종종 보내며 사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은 엄마가 웃는 모습을 위해서 살면 되고, 학창 시절에는 친구의 웃는 모습을 위해서 살면 되고, 청년 시절에는 애인을 위해서 살면 됩니다. 장년이 되어서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관계 속에서 충족감을 얻게 되면 주인공이 되지 않고 조연이 되거나 엑스트라가 되어도 괜찮다고 느낍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하나뿐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사랑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쉽게 웃어주었고,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 두 딸이 생겼는데, 그 둘도 당일치기 짧은 여행만으로도 아직 행복해합니다. 어디를 가든 어떤 곳에 가면, 최선을 다해서 놀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행복합니다. 제가 할 수 없는 것을 원한다면 제 하루가 빛날 리 만무한데, 아직은 다행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자랄수록 아이들은 세상을 배울 것이고 그것이 걱정되고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걱정되는 것은 가족에게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저에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 어떻게 보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정 리스크가 있는 것 같아요.)또 기대되는 것은 또 사랑하는 존재의 바람 때문에 제가 어떤 도약을 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은 종교처럼 증거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불씨 같은 믿음이라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없거나 우정도 없는 고립된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누군가가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말하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조차 어려운 상황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저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흘러간 시간처럼 듣고 흘려도 될 법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시선들을 마음속에 세웠습니다. 제3의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있는데, 당신이 없으니까. 제3의 시선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에 의지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삶에서 오는 막막함을 지난 시절의 저의 잘못된 행동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래서 새벽 예배를 가거나 하면, 저의 과거를 뒤져가면서 죄를 고백하고 그러면 ‘나는 백지가 되었으니 다시 한번 살아보자’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에 의지해서 한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절(취업 준비 기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고 결국은 지쳐버리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완전히 지치지 않았던 것은 종교에 의지해서 그 시간을 탕진하듯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작은 의지를 지켜봐 주는 절대적인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때때로 빛났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저에게 꿈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나의 불꽃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은 꿈 그래서 지금 시간을 쓰는 방식이 미래의 원인이 되길 바라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뭐,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찍 일어나서 열람실을 가고, 최대한 문 닫을 시간까지 그곳에서 앉아 있는 거죠.
그럼에도 떨어지는 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절대적인 시선도 녹이 슬었던 것 같아요. 일 년에 한 번씩 치는 임용시험에 떨어진 직후에는 뭔가 전공 책을 다시 파고, 작년에 녹음시켜놓은 교육학 파일을 다시 듣는 게 또 안되더라고요. 그럴 때는 백지에 각 단원의 제목만 써놓고 아는 것을 쓰는 작업도 했어요. 그런 것도 안 되는 날은 고향 친구에게 선물 받은 자기계발서를 읽거나 열람실을 벗어나 서가에서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 여러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약간은 외운다는 느낌으로 반복해서 선택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다 보면 책이 저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몇 번 곱씹어서 읽으면 그런 순간이 오곤 했습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내가 해볼 만한 것들은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습니다. 자기 계발서는 종적으로 내가 더 파고들게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부족한 노력을 꼬집어줬고, 잘못했던 선택을 말해줬습니다. 읽으면 아팠지만 막막한 세상을 가능성의 세계로 만들어줬던 것 같아요. 소설은 엄살피우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엿보면서 세상을 횡적으로 넓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어요. 자기 계발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무엇보다 반복해서 읽으면 책이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것은 몇 개의 구체적인 시선이 되었고 그것은 저에게는 산소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합당한 시간을 보내면 조금씩 빛난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혼자서 살아갈 때, 종종 빛나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적어도 마음속에 괜찮은 시선이 하나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한 미래보다 구체적인 시선이 있으면 삶은 때때로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누군가 바라봐주는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마음속에 있다면 오늘과 내일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잠시만이라도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혼자 먹는 밥도 괜찮고, 고시원의 작은 침대도 괜찮고, 함께 쓰는 샤워장과 화장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힘들었던 어떤 과거에는(그때는 여자친구도 없었지만) 미래에 태어날 아들을 상상하며 편지를 썼던 적도 있네요.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너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이렇게 보내고 있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쨌든 남은 생명을 소모하는 것이고, 빛난다는 느낌은 어쩌면 그 시간을 후회 없이 연소할 때 나타나는 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된 자아가 허물어지려 한다면, 그것 말고 또 다른 자아의 시선(사회적으로 합당한, 살아오면서 쌓아온 이미지에 부합하는)에 의지하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그 방법을 썼던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행동을 반복해서 할 수 있죠. 지쳤지만, 그 시선이 보고 있으므로 천천히 걸을지언정 완전히 정지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도 비슷한 것이라 생각해요. 초고는 손이 나가는 대로 쓰는 것이겠지만, 다 쓰고 난 뒤에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맞춤법이 맞는지 확인합니다. 또 고쳐 쓰면서 내 안의 또 다른 시선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어느새 나의 자아는 그 시선 덕분에 조금이라도 괜찮은 문장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사적인 글은 조금씩 공적인 글이 되죠. 그 공적인 글은 떳떳한 마음가짐이 됩니다. 사방이 막혀있는 열람실에서 그렇게 세상과 조금은 이어졌습니다. 허무했고 막막했고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던 지나간 시절이 조금은 모래처럼 반짝이는 뭔가가 된 느낌이 듭니다.
자영업자가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사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 같습니다. 다만, 일주일에 하루 정도 주인공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내 삶의 빛을 쫓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잠시라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괜찮은(별것 아닌 일에 칭찬해주는 고마운 분들) 손님이 온다면 그 손님을 제 안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장사가 조금씩 됩니다. 때때로 글을 쓰기도 합니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해도 삶이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살아갑니다. 물론 가족에게 받는 관심과 시선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고, 그 시선에 합당한 선택과 행동을 제가 반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고 깨어지기 쉬운 믿음이긴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이고 아름답고 오래도록 지킬 수 있는 시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가까이하면 좋을 것 같아요. 부디 당신에게 용기를 주는 책을 읽으세요. 너무 많은 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은 책을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책을 반복해서 읽어주세요. 그러면 마음에 어느덧 시선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시선에 합당한 행동과 선택을 할 수 있고, 가끔 빛날 수 있습니다. 그 빛에 기대어 한 시절을 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카페 인사이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카페 인사이드’ 글쓴이 - 정인한
김해에서 12년째 ‘좋아서 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커피를 내리고, 밤에는 글을 쓴다. 2019년부터 2년 동안 <경남도민일보>에 에세이를 연재했고, 2021년에 『너를 만나서 알게 된 것들』을 썼다.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ung.inhan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kyk
그동안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대체불가 작가님의 글은 어디에서건 계속 읽을 거랍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분씨
구체적인 시선을 보게 해 준 반짝이는 작가님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글로 앞으로 더 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