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몇 번의 공연에 참여했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교육연극을 준비한 적도 있고, 참여하던 댄스 동아리에서 댄스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무대를 꾸미는 일을 주로 맡게 되었다. 공연 후 뒤풀이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무대에서의 순간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관객들은 몰랐겠지만, 우리 눈에만 보이던 실수, 더 잘했어야 했다는 아쉬움 등등이 쏟아져 나오던 이야기들은 무대 위 조명만큼이나 반짝이는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내게 공연은 사람을 남기는 기억이었다.
<서울국제작가 축제>의 작가 대담 [작가, 마주보다: 미래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김보영, 이윤하 두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이언스 픽션(Science-Fiction) 이라는 내겐 조금 낯선 장르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궁금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대담에서, 나는 과거의 이야기인 신화를 미래의 장면으로 가져오는 두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번역되는 이야기
김보영 작가는 자신의 작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번역가에게 받은 질문, “이 사람은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리하는 탐정의 심정으로 인물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추측하다가,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했다.
“AI에게 무슨 성별이 있어요?” 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히고, 직책을 호칭으로 대신하는 한국어의 특성상 쓰는 사람조차도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지 고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서는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he’나 ‘she’, 그것도 아니면 ‘they’라는 어떤 대명사가 필요하다는 번역가의 질문이 과연 번역본에서 어떻게 소화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인물에 대해 상상한다. 작가가 내놓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내 머릿속에 어떤 인물을 떠올리고,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인물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AI, 신 그리고 각종 기계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김보영 작가는 “내 캐릭터는 무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문자로 이루어진 생물에는 성별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한다.”라는 에세이 속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다. 자신이 특별하게 성별을 지정하는 경우는 해당 인물이 고착화된 성별에 대한 기대감을 뛰어넘을 때라는 말을 덧붙였다.
결국 연결되는 이야기와 우리
‘글을 쓴다’라는 것은 대부분 혼자만의 작업이라 여기기 쉽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어느 정도는 고요하게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써 내려갈 이야기 속 인물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또 어떤 상황에 부딪히고,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명확하게 그려나가려면 작가에게는 구체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이윤하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어떻게 생동감 있게 그려나가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너무 비슷한 캐릭터를 갖지 않게 주의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격 유형 검사를 해보기도 하는데, 소설 속 인물들이 모두 같은 유형의 성격을 가지면, 그건 문제라고 말이다.
『Dragon Pearl』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예로 들면 충동적이며 자유로운 주인공 민, 규칙을 잘 따르는 보라와 하늘, 그리고 장난꾸러기 수진까지, 각각의 인물들을 창조하며 작가가 염두에 두는 것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고 응원하고 싶은 인물들을 그려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유난히 몰입하게 되는 인물들이 있다. 깊이 빠져들어 응원하게 되는 인물들도 있고, 때로는 못마땅함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나와 똑같은 연도에 태어난, 『82년생 김지영』 에게 나는 깊은 공감을 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와 커피를 마시다가 들었던 ‘맘충’이라는 말에 마음 아팠던 장면에서 나는 육아휴직 중 마주쳤던 직장 동료들이 던진 한마디, “여유로우면 나와서 일 좀 하지?”를 떠올렸었다. 작가들은 글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깊게 들어올 수 있도록 생동감 있는 인물을 통해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SF 계의 노벨문학상이라 불린다는 휴고상에 3년 연속 최종 후보로 지명된 이윤하 작가의 『나인폭스 갬빗』의 주인공 체리스는 소수 민족 출신의 우주 제국 장교다.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 우주 제국에 녹아들려 애쓰는 체리스는 시스템에 의해 억압받는 소수 민족 ‘므웬’을 자신의 일부로 느끼며 고뇌하다가 ‘구미호 장군’을 만나 거대한 우주 제국을 결국은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주에 간 구미호 이야기라니, 『나인폭스 갬빗』을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 문화 및 역사를 SF와 융합하는 예술 양식. ‘아프로 퓨처리즘’에 못지않은 ‘코리아 퓨처리즘’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한국계 미국인인 이윤하 작가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법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
김보영, 이윤하 두 작가 모두 현재의 SF 작가가 되기 전까지 다른 포맷의 글을 썼던 경험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김보영 작가의 경우 게임 시나리오를 쓰며 세계관을 창조해나가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대담에서 ‘먹고 살려고’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나는 게임 시나리오를 창작했던 경험이 지금의 김보영 작가의 이야기에 분명한 색깔을 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이윤하 작가는 <스타트렉>를 보고 감명 깊었던 마음을 팬픽으로 그려냈던 경험과 게임 음악을 작곡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몰두해야 하는 시간들이 분명 있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써 내려가는, 각기 다른 포맷의 이야기가 글을 쓰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국은 나의 이야기에 녹아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윤하 작가가 에세이에 남긴, “이야기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도 공동체 없이는 건조한 단어들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가만히 되뇌어본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두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글을 왜 쓰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나는, 오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말이다.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 뉴스레터는 서울국제작가축제를 주최한 한국문학번역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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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진아
매달 17일 <세상의 모든 문화> 뉴스레터에서 <일상의 마음챙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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