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 서점 앱을 커고 '실리콘밸리'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있는 책을 검색해보면 국내 도서 125권, 해외 도서 825권이 나온다. 이 둘을 합치면 무려 950권이나 된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실리콘밸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나 역시도 그러해서 실리콘밸리와 관련된 책이나 글, 영상을 종종 찾아보곤 했다. 그런 실리콘밸리를 지난주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사실 ‘실리콘밸리’는 공식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동남부 지역의 계곡 지대를 통상적으로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만의 남쪽 끝, 산호세(San Jose)부터 북쪽으로 레드우드 시티(Redwood City)까지의 도시들(산타클라라, 서니베일, 쿠퍼티노, 마운틴 뷰, 팔로 알토, 멘로파크)을 칭하는 말이고 때에 따라서는 동쪽으로 밀피타스와 프리몬트까지도 포괄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행정구역상 서로 다른 도시들의 모호한 조합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실리콘밸리’라는 단어가 품어 안으며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그만의 정신, 철학, 인식, 문화, 양태가 있기에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실리콘밸리’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실리콘밸리 지역에 머무는 동안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는 ‘삼각형’ 도형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첫 미팅이 있었던, 샌머테이오(San Mateo)의 공유오피스에서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주한 삼각형은 내게 묘한 느낌을 선사했다. ‘볼일 보러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맞나? 아닌가?’ 이런 질문을 품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서울 촌놈이 된 것만 같아서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국적인 것을 넘어선 어색함과 이질감, 마치 새로운 언어를 마주한 것만 같은 설렘과 긴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처음에는 글로벌 공유 오피스 회사의 실리콘밸리 거점이니만큼 ‘우리는 성별을 일반적인 잣대로 강력하게 나누어 규정하지 않습니다. 성(Gender)의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와 같은 그들만의 캠페인 표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 머무는 동안 큰 호텔에서부터 작은 음식점까지,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부터 외곽의 기념품 가게까지, 유명한 스탠퍼드대학교에서부터 동네 편의점까지 거의 모든 곳의 화장실에는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어떤 음식점 화장실에서는 삼각형을 그려놓긴 했지만, 삼각형 안에 ‘Man’(남성), ‘Woman’(여성)이라고 써놓은 곳들도 있었다. 어떤 회사 사무실 화장실에는 하얀 종이에 ‘Woman’(여성)이라고 손 글씨로 써서 삼각형 위에 붙여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곳마저도 ’삼각형’을 포기하지 않는 건 내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쯤 되면 ‘삼각형’ 이야기 좀 그만하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삼각형’이 내겐 굉장히 중요한 표식처럼 느껴져 다시금 떠올려 보고 곱씹어 보게 된다. 그들이 화장실 표지로서 ‘삼각형’을 고수하고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목적과 효과를 기대하는 것일까?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조직문화 탐사자’로서 바라본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그 ‘삼각형’ 안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성(Gender)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강력한 가정을 저변에 깔고 있다. 나아가 우리 도시에는, 우리 세계에는 다양한 성이 있고 그 다양성 속에 있는 당신을 초대한다는 포용의 사상을 품고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는 표지를 바라보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당신의 어려움을 살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편으로, 성별 구분과 성의 선택에 큰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우리 도시에는, 우리 세계에는 다양한 성(Gender)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그들과 함께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꾸준히 전하게 된다. 이는 ‘남성, 여성, 제3의 성’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설문지에서 품고 있는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적극적 활동(Action)이라고 보인다. ‘성 소수자‘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주류와 소수의 대결 구도를 넘어서, 소수성(Minority)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작년에 미국 최대 인사교육협회 콘퍼런스(ATD Conference)에 참여하면서 강연이나 그룹 토의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 가운데 하나가 ’DE & I'였다.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의 조합어로서, 미국 내 조직에서 인사, 교육, 조직 문화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개념이자 아젠다였다. ‘성(Gender), 인종, 민족 등과 관련된 차별을 철폐하고 다름을 품어 안겠다는 의지와 철학’을, 인사제도와 교육 프로그램, 조직문화 활동을 통해서 조직 내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성(Gender), 인종, 민족’과 같은 기준의 구분이 사회적인 이슈로 크게 표출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일해온 나로서는, 미국 내 인사교육 조직문화 담당자들의 고민에 깊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안에서도 ‘성 소수자, 이민자, 다문화 가정’과 같은 아젠다들이 점차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고, 나아가 ’세대, 나이, 출신과 배경 등’과 같은 영역까지 확장해서 볼 때 ‘DE & I’가 비단 그들만의 키워드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성 소수자’와 관련한 아젠다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조직 내 고민이 미국에서는 매우 컸는데, 이번에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삼각형’을 마주하면서 그들의 문제 접근법과 해결책의 비밀을 조금은 맛본 듯 해서 기뻤다. 우리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며 회귀의 존재라서, 사회적으로 합의한 어떤 메시지를 지속해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짧고 간결한 문장, 심플한 도형과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지속해 철학과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를 조직으로, 회사 안으로 가져와서 생각해 보면, 조직 안에서 서로 합의한 가치와 철학을 구성원들 간에 공유하고 지속해 강화하면서 이어갈 수 있는 비법 가운데 하나가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구나 싶다. 그 이미지를 볼 때마다 현재의 구성원들이 되새기고 조직 생활에 적용해 볼 수 있고,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직에 들어오고 세대를 거치며 이어질 때도 지속할 힘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이 속한 조직에서, 당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가치와 철학,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걸 어떤 형태의 이미지로 함께 나눠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한 주의 시작 월요일을 보내보는 것도 나름 의미와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 글쓴이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 가까이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9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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