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기린

2022.07.05 | 조회 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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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대학 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삶나눔' 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한 주에 한 번씩 서너 명이 모여 요즘의 상황, 고민, 기도를 부탁할 내용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적당히 모임 시간과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가늠하며 십 분 내외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유독 두 시간 남짓한 모임 시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었다. 한 주만에도 이렇게 할 이야기가 쌓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날씨로 인한 감정 변화부터 반려견의 안위, 가족의 대소사까지 인생의 모든 고민을 다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차례에 와서는 마치 미리 정리된 요약문을 읽는 것처럼 오 분 만에 할 말이 끝났다.

나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소 친구들을 만날 때도 내 감정에 대해서 잘 드러내지 않았다. 주로 상대 이야기를 듣는 편이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잘 꺼내지 않았다. 특별히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사람들은 기본 타인의 구구절절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불편해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내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어 상대가 불편해지거나 후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와 한참 카페에서 있다 나오는 길에 친구가 물었다. “너는 누구한테 이야기해?" 그러고보니 4시간 내내 거의 친구 이야기만 들었던 것이다. ”나는 워낙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좋아.“ 사실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나서 상대에게 괜한 부담을 주었다는 후회를 하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내향적인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 때는 몰랐다. 나도 그렇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남편과 가장 큰 갈등은 ‘이야기’였다. 나는 마음이 지칠수록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남편은 에너지가 달릴 때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서로의 접점을 찾지 못해 부부상담을 받은 날, 상담사는 나의 깊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기원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그동안 부모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수도 없이 분석했지만,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처음이었다.

어릴 적 딸의 마음 상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결혼 생활의 괴로움에 잠겨있던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이야기할 곳을 찾지 못했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아버지와의 힘든 시절을 반추하는 어머니의 푸념을 듣는 밤이 많아졌다. 내 이야기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누군가가 들어주길 바랐으나 그러지 못했던 좌절감이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커서도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를 깁스한 날에도, 남자친구와 헤어진 날에도, 학과 선택을 앞두고 괴로웠던 날에도 어떻게 지내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별 일 없이 잘 지내요”라고 답했다. 가뜩이나 무거워 보이는 그들의 삶에 내 걱정까지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소소한 학점 스트레스나 수강 선택, 충치가 생겼다던가 하는 문제까지 부모님께 말하는 친구들이 나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부상담이 진행될수록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먼지처럼 쌓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실은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충분히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피느라, 그리고 내 말에 관심이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해서 내 이야기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의 천재를 만났다. ‘너무 과한 정보’라는 뜻의 ‘TMI(too much information)’가 그녀의 별명이었다. 그는 간식으로 바나나를 회사에 싸 온 이유를 한 시간 동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망원시장의 바나나 수급 현황이나 장을 보는 어머니의 성향, 바나나 보관법까지 대화의 소재는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 상대가 지루할 수도 있다거나 상대의 시간을 뺏는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러한 TMI가 지루하거나 부담스럽기는커녕 그녀에게는 나도 저렇게 사소한 일을 구구절절 얘기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잠시 마음에 스치고 지나가는 설렘이나 불만, 걱정 같은 소소한 감정도, 커피를 잘못 주문해서 평소보다 쓰게 마셨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괜한 소음 공해만 일으킬 것 같은 수준의 하찮은 사건도 그냥 주절대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TMI 답게 내가 두루뭉술하게 하는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건 왜 그랬어?" "누구랑 있었던 거였어?" 성에 찰 때까지 꼬치꼬치 물어봐주었다. 서로 바쁜 것 같아 근황을 털어놓는 일이 뜸해지던 날, 그는 "관계는 이야기를 할 때 자랄 수 있는 거야"라고 또다시 꼬드겼다. 나도 따라 읖조렸다. "관계는 내 이야기를 해야 자랄 수 있는 거구나."

 

교회 청년부에서 길고 긴 '삶나눔'을 하던 그 친구는 결국 만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웹툰 작가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수다왕들 사이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지만,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주고 물어봐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마음을 꺼내놓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그 반짝이는 순간을 사랑한다. 지금도 그러한 시간이다. 그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자라고 또 나에게도 조금 더 넉넉해진다.

 

 

 

* 매달 5일 '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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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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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diejoo

    0
    almost 2 years 전

    아.. 실은 정말 그랬던것 같기도 하네요..상대가 내 말에 관심이 있다는 확신이 없어 말하지 않았다 혹은 하지 못했다 라는 것.. 나이가 들수록 그런 확신이 있는 사람들만 주변에 남게 되는 것을 보면요.. 글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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