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사랑 <색, 계>_연애하는 영화_홍수정 영화평론

2023.04.21 | 조회 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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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 이번 호에서 다루는 <색, 계>에 대한 글의 초고는 올 1월 실수로 구독자 분들께 미리 발송된 적 있습니다. 네.. 제가 제 글을 스포일링 해버린 셈인데요. 이번 글은 초고를 다듬어 완성한 글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냥 다루지 말까 잠깐 생각했지만, 요청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가 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해서요.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영화 <색, 계> 포스터
영화 <색, 계> 포스터

이 영화만큼이나 많은 오해를 받는 영화가 또 있을까. <색, 계>는 고작해야 파격적인 정사씬, 위험한 첩보 로맨스물로 회상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굳이 영화제 수상 사실을 언급하지 않아도 <색, 계>는 사랑과 감정을 둘러싼 떨리는 파동을 특유의 섬세함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다.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심리 묘사는 특출난 부분이 있다. 고국을 위해 몸을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 스파이, 나라를 버린 반역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비참한 현실. 영화는 여자를 끝까지 쫓아가고 쫓아가서 기어이 잊지 못할 순간들을 스크린에 새긴다. 중요한 장면들과 함께 <색, 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보려고 한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 복권되기를 바라며. 이번 기고는 두 편에 걸쳐 독자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 편이다.

 

※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색, 계> 스틸컷
<색, 계> 스틸컷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1938년 홍콩. 대학에 입학한 왕치아즈(탕웨이)는 우연히 잘생긴 연극부 선배 광위민(왕리홍)을 보고 호감을 느껴 연극부에 가입한다. 그곳에서 왕치아즈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만, 연극부는 급진 항일단체로 변해간다. 그들은 친일파 핵심이자 정보 부 대장인 이(양조위)를 암살하려 한다. 왕치아즈는 '막 부인'으로 변신해 이의 부인에게 접근하지만, 이가 상하이로 발령 나며 계획은 흐지부지 끝난다.

3년 후, 왕치아즈는 다시 이에 대한 암살 작전에 가담한다. 그녀의 임무는 이를 유혹해 암살 장소에 불러내는 것. 그러나 격동의 시기에 고위 관료로 지내온 이는 동물 같은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는다. 둘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예민하게 탐색하고 치열하게 경계한다. 살 떨리듯 긴장되고 섬세하며 위험한 사랑의 감정들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색, 계>는 무엇보다 날 선 장면들 사이에 숨겨진 감정이 인상적인 영화다. 왕치아즈와 이가 처음 대면하는 장면도 그렇다. 이는 아마도 항일 운동가를 고문하며 탄압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처리할 정도로 죽음과 살을 맞대고 사는 냉혹한이 '이'라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집에 들어와 거실에서 마작을 두고 있는 부인들을 훑어본다. 그 순간 왕치아즈는 자신의 순서라는 점을 잠시 잊은 채로 멈칫거리다, 다시 마작을 둔다. 이 찰나의 머뭇거림이 참 좋다. 그리고 이어지는 묘한 시선들은 왕치아즈와 이의 사이에 어떤 '텐션'이 존재함을 알게 한다. 이 장면의 완성도는 감독의 연출력과 두 배우의 눈빛에 빚지고 있다. 둘이 서로 눈빛을 흘깃거리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스크린을 팽팽하게 채운다.

 

<색, 계> 스틸컷
<색, 계> 스틸컷

그리고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왕치아즈가 처음 대학 연극부에 들어간 순간을 보여준다. 그녀가 연극부에 흘러온 데에는 선배 광위민에 대한 호감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감정이 늘 그렇듯 이성에 대한 호감과 연극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애국에 대한 마음은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로 뒤섞여 그녀를 연극의 세계로 이끈다.

그녀는 무대에 올라 매우 훌륭하게 연극을 수행한다. 이때 인상 깊은 것은 그녀가 어떻게 관객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배역에 얼마나 심취해 있느냐는 것이다. 왕치아즈는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자신의 배역에 깊이 몰입하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의 임무인 '이와 사랑에 빠지는 일'에 깊이 몰입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 대목에서 이미 결말 부분에 등장할 파국이 엿보인다. 연극이든, 임무든, 사랑이든, 왕치아즈는 자신의 온 몸을 그곳에 내던지는 사람이다.

연기자로서 왕치아즈의 재능은 눈이 부시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연극단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기보다는, 어떻게 애국 활동을 이어나갈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인다. 이들은 벌써 시선을 두는 곳이 다르다. 연극단 멤버들과 왕치아즈 사이의 미묘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색, 계> 스틸컷
<색, 계> 스틸컷

이제 연극단은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암살계획에 돌입한다. 왕치아즈와 동료는 막 사장 부부를 연기한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의문스러운 것은 왕치아즈의 위치다. 그녀는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가? 연기자인 동시에 애국운동가. 하지만 그녀는 후자보다 전자에 더욱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녀의 위치를 어느 한쪽으로 정확히 설정하지 않은 채, 마치 연기를 하듯 혹은 애국 활동을 하듯,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마음 다해 수행하는 왕치아즈의 활동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의외의 수확. 왕치아즈는 이가 처음으로 식사를 함께한다. 이는 그녀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하자 왕치아즈의 눈빛에는 작전에 성공했다는 만족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우려, 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떨림이 모두 어른거린다. 영화는 이 순간 떠오르는 다양한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담아내고 탕웨이는 마치 칼춤을 추듯 이 장면을 황홀하게 연기해 낸다. <색, 계>가 여성의 심리묘사에 얼마나 탁월한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순간 두 배우 사이를 오가는 눈빛들은 우리의 숨을 멎게 한다.

하지만 절망도 찾아온다. 아직 성관계 경험이 없는 왕치아즈가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도록, 극단 동료 중 한 명이 그녀와 관계를 갖기로 결정한 것. 왕치아즈는 감정 없는 동료와 마치 숙제를 끝내듯 관계를 가진다. 한때 좋아했던 선배인 광위민은 이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따름이다.

절망은 한 번 더 그녀의 따귀를 친다. 이 부부가 갑자기 상하이로 이사를 간 것이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희생한 왕치아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때로 인생에서 모든 것을 던진 시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때고 있고, 넋이 나간 공허한 마음에는 비참함과 허무함이 난입해 자리를 메운다. 연극단 멤버들은 말없이 철수한다.

 

<색, 계> 스틸컷
<색, 계> 스틸컷

다음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참 좋아하는 장면이다. 철수하려는 그들 앞에 고향 선배가 찾아오고, 연극단을 고발하겠다고 협박한다. 이들은 충돌 끝에 선배를 죽이고 만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이유는 그들의 어설픈 민낯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의를 울부짖던 그들은 정작 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손을 베어가며 고향 선배를 난도질해 죽이고 만다. 그러면서 '매국노의 개로 일한 대가'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행동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곳에는 명분도, 정의도 없다. 그저 거창한 계획이 현실에 부딪혀 좌절되었을 때, 목표물을 놓쳐버린 열정과 분노가 오작동하는 슬픈 풍경만 있을 따름이다. 공명심에 가득 차 있던 학생들은 그들이 외치던 '살인'의 실체를 처음으로 목격하고 패닉에 빠져 울부짖는다. 결국 암살은 수포로 돌아가고 정의인지 충동인지 모를 그날, 그 밤의 살인만을 남겨둔 채로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왕치아즈는 핏기 없는 얼굴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시체가 나뒹구는 거리에서는 더욱 엄혹해진 일본의 압제가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왕치아즈 앞에 광위민이 다시 나타난다. 그는 '저항군'이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다며 못다 이룬 계획을 실행해 보자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임무를 제안한다. 미인계로 '이'를 꾀어내 암살하는 임무를. 

<다음 호에 '2편'이 이어집니다>

 

 

[코너] 연애하는 영화

연애 영화를 한 편씩 꼽아 함께 들여다보며 인간의 감정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 관한, 그보다는 마음에 관한, 사실은 당신과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공간. 

[필자 소개] 홍수정 영화평론가

혼자서 영화와 글을 좋아하다가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잡지와 웹진에 영화, OTT,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브런치 블로그  https://brunch.co.kr/@comeand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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