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 드르르르르, 쾅쾅’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서점 오픈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남들은 인테리어 공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던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공사가 끝나는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낀 설렘을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려움 역시 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설렘으로 시작했다. 상가를 계약하고, 다양한 인테리어 업체와 미팅을 진행했다. 서점 이름은 좋아하는 소설「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인 ‘크레타’로 정하고 세부 컨셉을 다듬었다. 메인 컬러와 내부배치를 결정한 뒤 디자인을 확정지었다. 긴 시간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이미지가 철거 공사와 함께 구현되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아내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고백한 뒤 두근거리던 심장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하지만 시작의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 날 계약금을 이체했다. 통장에는 뒤에서부터 ‘0’이 몇 개인지 세어봐야 알 수 있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통장에서 돈이 나가자, 목공사와 전기공사 업체가 비어있던 공간으로 들어왔다. 공사는 반도 진행되지 않은 것 같은데 중도금을 입금해야 하는 날은 빠르게 찾아왔다. 통장에는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왔으면 하는 숫자가 또 한 번 찍혔다. 책을 몇 권 팔면 이 숫자가 다시 통장에 기록 될지 처음으로 계산을 해봤다. 불가능해 보였다. 두려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한심스러워 보였다. 어쩌자고 서점을 하려 했을까. 그 순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구를 들고 열심히 작업 중인 분들이, 지금까지의 결과물을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둘러 공사현장에서 빠져나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생은 실전이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날 이후 공사현장에 매일 방문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당신들 똑바로 하는지 지켜보고 있어.’라는 무언의 메시지만 열심히 보내다 올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는 믿고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 입장이 되자 감시, 감독을 열심히 하고 말았다.
두려움은 불안감을 키웠고, 커진 불안감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사전에 결정 되었던 책장 디자인과 컬러 변경을 요청했다가 다시 번복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작업반장님의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내 돈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또 한 번 공사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골목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생각을 비우고 싶었지만 ‘수많은 일들 중에서 왜 서점이지?’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하지 않고선 이 혼란은 반복될 것 같았다. 도대체, 읽지 않는 시대에, 나는 왜 서점을 하려는 것일까?
대화 속에 책 향기가 묻어나는 사람
10대 학창시절엔 늘 따돌림을 당했다.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기 초에는 반장, 부반장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친구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진심을 담은 직설적인 조언을 남발했는데, 결과는 나의 의도와 달랐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지기 시작했고, 학기 말에는 친구들이 곁에 없었다. 급식도 다른 반 친구를 찾아가서 먹었다. 20대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 학년 대표도 하며 열심히 생활했지만, 내 곁에 머무르는 친구들이라기보다는, 내가 외롭지 않으려 억지로 붙잡아두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며 매력적인 동기를 만날 수 있었다. 항상 책을 읽고 있었으며, 대화를 하면 ‘어떤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일 것 같아.’ 라며 책을 자주 인용했다. 충격적이었다. 전공이 수학이라 그런지 국어선생님 외에는 대화에 책 이야기를 활용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작위적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 친구처럼 나의 대화 속에도 책 향기가 묻어나길 바랬다.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복학을 한 뒤 본격적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책을 혼자서 꾸준히 읽을 자신이 없어 모임을 만들었다. 독서모임을 시작한 뒤로는 대화 주제가 무궁무진해졌다. 더 이상 억지로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드라마나 예능을 챙겨보거나, 과거 에피소드, 시시한 농담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한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중간에 말을 자르지 않고 경청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책의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 내가 겪은 비슷한 사건과 깨달음, 지금 갖고 있는 고민을 나누는 경험은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가 생겼다. 독서모임 진행자라는 역할로 인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서 듣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한 것이다. 듣는 사람이 되자 나를 먼저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자유롭게 일상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고, 믿고 함께 해주는 동료가 생겼다. 이젠 애써 친구들을 곁에 붙잡아두지 않아도 괜찮았다.
독서모임이라는 하나의 문화.
독서모임의 규모도 자연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도를 모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고, 저자초청강연회를 열어보기로 했다. 처음엔 일개 독서모임이 요청하는 자리에 작가님들이 응답해주실지 걱정이었고, 기업이나 기관에서 드릴 수 있는 강사비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을 드릴 수밖에 없으니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괜한 우려였다. 작가님들을 끊임없이 모실 수 있었다. 마냥 동경만 하던 분들이 우리의 요청에 부산까지 와주셨다. 도서관, 기관이 아닌, 책을 가장 곁에서 나누는 독서모임이라서, 독서모임이니까 꼭 오고 싶으셨다는 말씀이 와 닿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정성스레 강연 제안서를 보내줘서 올 수 밖에 없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메일 한 통이지만 전해졌다는 것이 뿌듯했다.
참가자 분들도 직장 걱정 없이 편하게 참여 할 수 있는 주말에, 작가님들을 곁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한 모임이라며 고마워하셨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함께 즐기는 만남이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책으로 만나고, 소통하고,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서로가 동등했으며, 다른 의견을 얘기해도 안전했다. 몇 분은 이 일이 나의 본업이라 생각했는지 직원 채용 계획을 물으며, 자기를 직원으로 채용 해달라며 진지하게 요청했다. 이 일이 취미 그 이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에서 책을 활용한 작은 문화를 만들기 시작하자 우리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원해주는 어른들도 생겨났다. 출판, 동네서점, 도서관 등 독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접점의 관계자들을 만났고, 독서문화를 이끌어 가는 한축으로 독서모임을 인정 해주셨다. 점점 내 곁에는 나의 존재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주변에서는 나를 ‘문화기획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지역의 ‘문화 씬(Scene)’에 속하게 된 것이다. 내가 활동하는 영역이 생기자 ‘아, 이런 게 사는 맛이구나.’ 하며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맛을 좀 더 진하게,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이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책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기존의 관계들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학을 전공한 친구들이 밟아 나가는 코스에서 이탈했더니 서로의 존재가 어색해졌다. 한참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 때문이겠지만, 친구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 투성이었다. 학과 회장까지 하며 가장 중심에서 생활했지만, 이젠 외딴 곳에 덩그러니 떨어진 이방인 같은 존재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나는 책이 없이는 소통을 할 수 없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수록 책과 책을 통해 맺어진 관계에 더욱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것마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자신에게 맡겨진 ‘그 일’을 찾아서.
결국 책으로 함께 하는 삶을 나의 업으로 삼아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이드 프로젝트가 아닌 본업으로 나의 모든 시간을 이 일에 쏟는다면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 커뮤니티가 스타트업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시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부산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췄으니 물 들어올 때 노만 잘 저으면 될 것 같았다.
다니던 회사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새로 직원을 뽑고 인수인계도 마쳤다. 이젠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잠깐이면 지나갈 것 같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독서모임 커뮤니티는 만나야 하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 답이 안 보였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긴 시간 이어왔던 독서모임 활동을 경력으로 인정받아 공공기관에서 청년사업 담당자로 일하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 줬고,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게 해줬으며, 새로운 직업까지 선물했다. 책이 또 한 번 나를 살렸다.
2010년, 故 구본형 작가는 내게 이런 편지를 써주셨다.
1986년 옥스퍼드 대학의 우주학자인 존 배로우와 프랭크 티플러는 '인류학적 우주론 원리' Anthropic Cosmological Principle 라는 멋진 책을 쓰게 되었다네. 그 책 속에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운명은 우주의 생명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네. 우리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은 전혀 우스운 말이 아니라네. 카를 구스타프 융의 말을 기억하게.
"꽃봉오리가 열리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부터 위대한 것이 태어나는 인생의 정점에서, 하나는 둘이 된다. 늘 우리의 내부에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았던 이 위대한 모습은 대 각성을 촉구하며 지금까지의 나에게 정면으로 맞서 떨쳐 일어난다."
젊음은 젊음으로 인생에 기여한다네. 너무도 쉽게 늙지 말게. 위대한 것이 그대의 가슴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주와 공명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그 일'을 반드시 해 내게.
결국 내게 있어 책은 세상과 관계 맺고,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이자 최고의 파트너다. 더 이상 따돌림도 당하지 않고, 누군가를 곁에 붙잡아 두려 애를 쓰지도 않는다. 안정적인 월급의 쾌락도 좋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최고의 파트너를 계속 외롭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해보겠다는 그 결심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다’는 마음은 ‘해야 한다’로, ‘해야 한다’는 마음은 ‘해내야만 한다’는 다짐으로 무럭무럭 자라버렸다. 결국 책을 비즈니스와 영혼의 파트너로 삼아 동행하는 것, 그것이 내게 맡겨진 ‘그 일’이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서점’이었다.
골목 산책을 마쳤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불안과 두려움은 조금 가라앉았다. 공사현장에는 최선을 다해서 작업 중인 선생님들이 계셨다. 눈치를 잠시 보다 두 손 가득 준비한 음료와 간식을 챙겨드리며 말했다. “크레타, 최고로 멋지게 좀 만들어 주세요!” 그러자 작업반장님은 언제 다퉜냐는 듯이 한 마디 툭 던지셨다. “책장 예쁘게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쇼!” 이 말 한 마디에 신기하게도 공사에 대한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오후 5시가 되자 작업자 분들은 짐을 챙겨 떠났다. 나는 마지막 문단속을 하며 지금은 어수선하고 정신없지만, 얼마 뒷면 책으로 가득 찰 공간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제게 맡겨진 그 일, 한 번 해보겠습니다!’
* 글쓴이 소개 - 강동훈
부산에 살며 독서모임을 하며 2,30대를 보냈습니다. 결국 서점을 열었습니다.
* 서점 소개 - 사유와 자유의 섬 ‘크레타’
부산 서면에 위치한 작은 서점이자 모임공간입니다. 주제별, 장르별로 큐레이션 한 도서를 판매합니다. 아참, 매일 아침 문장 입간판도 쓰고 있습니다.
서점 크레타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독서모임 사과 : www.instagram.com/bookclub.apple
의견을 남겨주세요
da2parkpark
안녕하세요, 저는 강동훈님(호칭을 뭐라고 해야할까요ㅜㅜ)께서 기획해주신 북토크 통해 너무나 좋아하던 은유작가님을 코앞에서 뵙고 에너지를 전해 받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던 한 사람입니다. 혹시나 또 좋은 기회가 되어 좋아하는 작가님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강동훈님 블로그를 자주 오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크레타도 알게 되었구요. 새롭게 크레타 시작한다고 하셨을 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멋지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느껴져서 꼭 댓글을 남겨야겠단 마음에 로그인을 했어요. 한 사람이 꿈을 쫓아 온 마음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는 것,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언제나 큰 감동을 주나봅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두렵지만 그 길이 꿈, 사명, 나다움처럼 삶을 잘 살아내는 길이라면 두려움은 거기에 따라오는 부록 같은 것 같아요. 기꺼이 두려움과 함께 새 길로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받습니다. 크레타, 번창할 거예요. 정식 오픈하면 찾아가겠습니다 ^^ 귀한 글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동훈
진심이 전해지는 응원의 메세지에 폭풍 감동입니다 😢😢😢😢😢😢 매일이 두렵고, 이게 잘 한 선택인지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여기 저기서 응원 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으셔서 매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책 팔아서 생존하는 책방이 될 수 있도록 멋지게 한 번 꾸려보겠습니다 :) 담에 책방 오시면 제게 꼭 말씀해주세요 ♡♡♡♡
의견을 남겨주세요
해피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합니다. 서점이 사라지는 시점에 용기를 내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조르바의 진정한 자유를 향하여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즐기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은 없으니까요!!!
강동훈
조르바처럼 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여정을 즐겨보겠습니다 :)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