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이다. 여전히 깜깜한 밤을 품고 있는 듯한 짙은 회색빛의 바다의 수평선을 뚫고 주황색의 태양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듬성등성 자리를 차지한 구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바다에 반쯤 걸친 태양이 일몰의 모습과도 비슷해보인다. 엘리는 생각한다.
‘일출에 이렇게 순간순간에 빠져들어 본 적이 얼마 만이지? 아니 그런 적이 있었나?’
통역 행사장을 가기 위해 화장을 하다 멈추고는 핸드폰을 들어 세상이 밝아지는 사이를 담아본다. 일출 직전의 색들이 그림처럼 층을 이루며 그녀의 시선을 빼았았다. 어두운 바다위 살짝 머리를 드리운 빨간 색에 가까운 태양의 머리, 그 위로 점점 옅어지는 주황색, 노란색을 지나 어두은 하늘색을 두르고 있는 장면과 그 뒤로 몇분 사이 이어지는 일출에 마음이 일렁이다 못해 취하는 기분이다. 서울에서 챙겨온 히비스커스 차를 투명 컵에 우려내어 빨갛고, 새콤하고, 달큰한 차를 마시다 보니 통역사로 일하며 이전에 묵었던 호텔들이 떠오른다.
통역사와 호텔
인하우스 통역사로 근무하다 보면 기관마다 다르지만 가끔은 지방이나 해외에서 개최되는 큰 행사 기간동안 통역을 해야하고 호텔에서 묵어야 할 때가 있다. 호텔은 대개는 주체측에서 정해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해진 숙박 경비 안에서 통역사가 행사지 숙소를 결정할 수도 있고 예산을 초과하면 그 차액만 통역사 개인이 지불하기도 한다. 프리랜서의 경우도 통역사가 많이 없는 지방에서 열리는 행사에서는 숙박 지원이 된다. 드물게 주체 측 여력에 따라 특급 호텔에서 묵게 되기도 한다.엘리도 서울의 한 특급 호텔에서 4박을 했던 적이 있다. 헬스장, 라운지바, 조식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머물 수 없는 호텔을 누릴 생각에 운동복도 챙기고 들떠있었다.웬걸. 조찬 통역부터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나면 저녁에는 쓰러져 자기 바빴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주는 설레에 맥주 한잔이 간절했고 마침 여유가 생겨도 다음날 통역에 지장이 있을까 봐 참곤 했다. 귀빈이 떠나고 난 아침에서야 조식을 2시간 동안 느긋하게 이용했다. 출장지에서의 로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출장 팁 - 드라이 샴푸와 스타일러
내돈 내산 드라이 샴프다. 조찬 통역은 아침 7시부터 일정이 시작되기도 한다. 체류하는 며칠 사이 많은 미팅을 하고자 하는 임원진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7시에 행사장에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으로 참석하려면 일찍 일어나 단장해야 한다. 머리를 감느냐 더 자느냐의 고민은 출장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늦잠이라도 자면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럴 때 엘리는 드라이 샴푸를 사용한다. 손바닥 사이즈의 드라이 샴프를 뿌리고 잠깐 몇 번 머리를 흔들어 주면 드라마틱하게 깔끔해진다.머리 모양 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단정한 옷에 생긴 주름이다. 장시간 차 속에서 이동하면서나 캐리어 속에서 눌려 생긴 주름은 물을 뿌려 옷걸이에 걸어 놓아도 온전히 펴지지 않는다. 언젠가 주최측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스타일러를 처음 사용해본 뒤로 엘리는 호텔 선택권이 주어지면 스타일러가 있는 곳으로 선택한다. 스타일러가 있으면 정장류의 옷을 입고 불편한 채로 출장지로 향할 필요가 없어진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스타일러에 넣어 작동 시킨 뒤 짐정리를 이어나가는게 출장 루틴이 되었다.
이번에는 워케이션을 작정하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엘리는 이번에는 숙소 지원이 되지 않는 통역을 하기로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녀가 관심있는 분야였고, 행사지가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도지는 바다를 향한 열병이 갑자기 불꽃이 튀듯 올라왔다. 에이전시와 통역일정을 컨펌하고 묵을 호텔을 고르는데 마치 휴가지를 결정하고 난 뒤, 묶을 곳을 선택하는 것 처럼 설렌다. 회사에서 출장으로 방문하면 다음 날이 주말이 아닌 이상 휴가를 내서 혼자 더 머무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이 편치 않다. 그게 아니었어도 더 머물고 싶었던 곳이 없었기에 더 머물기로 결심한 적이 없기도 하다.이번에는 통역 일정 뒤로도 숙박 일정을 잡았다. 평일 비수기라 좋은 레지던스 시설을 저렴한 비용으로 예약할 수 있었다. 호텔에 오래 묵다보면 라면하나 끓여먹기 힘든 점이 참 불편하다. 매끼 사먹을 수도, 아침을 해먹을 수도 없는데다가 슬리퍼 착용은 체크아웃 때 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아 카페트 위를 그냥 맨발로 걸어 다니곤 했다. 레지던스에 투숙하는 것은 처음이다. 엘리는 싱크대 안에 구비된 과도로 사과를 깎아,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 먹으며 장기 출장일정에는 가능하면 취사가 가능한 레지던스가 가장 적합한 숙박형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프리랜서 통역사라서
가능한 일이러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출장 일정 이후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분야의 일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불안정한 만큼 자유롭다.
환상적이다 싶을 만큼 아름답게 쏟아지던 아침 일출을 빠져 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매일 할당되어 해야 하는 번역을 마치고,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 행사장으로 달려가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불편한 정장을 벗어 던지고 숙소 앞의 다시 깜깜해진 바다 앞 모래 위를 걷기시작했다. 소금 내를 품은 바람이 코의 감각을 두드린다. 눈을 감고 부서지를 파도 소리에 집중하다보니 문득
라는 생각이 스친다.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인 워케이션(Workation)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확대되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일을 하면서 휴가도 즐기자는 개념이다. 과연 가능할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엘리는 확실히 워케이션 중이다. 원래의 워케이션의 의미와는 살짝 다르지만. 적당한 바람을 타는 가을 바다 파도 소리가 하루종일 정신없던 그녀의 마음을 달래준다. 코로나가 끝나고 오랜만에 느끼는 북적임었다. 내일은 얼마 전 TV에서 본 해변 열차를 탈 작정이다. 이틀 간의 일을 마치고 온전히 혼자인 여행을 즐길 예정이다. 프리랜서로 앞으로 어떠한 불안정의 파도를 맞이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주어지는 일에 감사하며,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가며, 그녀의 최선을 다해 지내보겠다며 바다 앞에서 그렇게 힐링의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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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로 먹고살기’를 출간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세상과 세상, 언어와 언어사이의 소통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전세계와 소통하며 그로인해 확장된 경험을, 국내파로서 영어교육과 학습에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메일 : lovelyjy0708@gmail.com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jiyoungpark0708 인스타그램 : https://instagram.com/allie_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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