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지폐 오만 원권을 보여주며 "이 사람 누굴까?" 했더니 대번에 "신사임당이요!" 했다.
"맞아, 신사임당의 얼굴이 왜 지폐에 실렸을까?"
"훌륭한 사람이어서요!"
"신사임당은 왜 훌륭할까?"
이미 백 원 이순신, 천 원 퇴계 이황, 오천 원 율곡 이이, 만 원 세종대왕을 차례로 보면서 각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켰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등등. 그런데 아이들에게 신사임당이 왜 훌륭한 것 같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정작 나는 신사임당이 왜 훌륭한지 스스로 납득을 못하고 있었다. 왜군과 피 흘리며 싸운 것도 아니요, 무려 한글을 만든 엄청난 업적도 없었고, 그림을 잘 그리긴 했으나 새로운 화풍이었다던지 새로운 소재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운 것이 대단하고 남편 이원수가 영의정 이기의 집에 드나들 때 말린 것 등 남편을 바른 길로 인도한 것이 현명하다고 할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폐 속 다른 위인보다는 뭔가 내세울 게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갑자기 이제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소리쳤다.
"마음이 예뻐요!"
정말 놀라웠다. 아이는 마음이 예쁜 게 지폐에 들어갈 만큼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은 ≪훌륭한 예술가이며 현명한 어머니 신사임당≫이었다. 신사임당의 일대기가 담긴 이 그림책에서는 닭이 신사임당이 그린 벌레를 쪼아 먹은 에피소드와 마을 잔칫날 어느 부인의 치마에 국물이 쏟아졌는데 신사임당이 그 얼룩 위에 포도를 그려 부인을 도와준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이 책에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자연을 사랑하여 풀과 벌레를 관찰하며 초충도를 그렸고, 커서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남편을 사려 깊게 내조하고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며 곤란에 빠진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등 주변을 살피고 챙겼던 신사임당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맞다. 마음이 예쁘구나. 마음이 예쁜 게 훌륭한 점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위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뭔가를 '해서' 나빠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더 많은 소를 키우기 위해 아마존 숲의 나무를 베고 방목지로 만들기보다 '지구의 허파'로 내버려 뒀으면 좋지 않았을까. 더 많은 목화를 재배하려고 물을 끌어쓰다가 물줄기가 말라 사막이 된 아랄해도 있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셀 수도 없다.
문득 마음이 예쁜 상태로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게 세상에는 더 좋은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존재만으로 내게 온기를 준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작년 초 입적한 틱낫한 스님 생각도 났다.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깜깜한 밤에 고요히 켜져 있는 촛불과 같은 이들. 어쩌면 세상을 안전하게 하고 환하게 밝히는 건 조용하고 마음 예쁜 수많은 사람들인 것 같다.
아이들에게 신사임당에게 편지를 써보자고 했다.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오늘 내게 깨달음을 준 아이가 쓴 편지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OO이예요. 신사임당님이 저한테 그림을 하나 주셨으면 좋겠어요. 신사임당님처럼 글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신사임당님처럼 마음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나는 파란 색연필로 '신사임당님처럼 마음이 예뻤으면 좋겠어요.'에 밑줄을 그은 뒤 마침표 옆에 조그만 하트를 그려줬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진솔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kateinthe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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