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은 이제 그만_신은빈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출간 기념 에세이 공모전 당선작

2022.11.08 | 조회 1.0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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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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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은 우습게도 사무실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 순간 찾아왔다. 너는 아침에 톡을 여러 번 보내지도, 일과 시간에도 역시 톡을 거의 안 보내는 편이었는데도 나는 자꾸 PC카톡에서 너의 프로필을 들여다보다가 업무를 보곤 했다.

8년의 시간이 정말로 10분 만에 끝이 날 줄은 몰랐다. 내 손목을 떼어놓는 너의 단호한 손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별이 실감나지 않는 나는 눈물조차 고이지 않았는데, 너는 그런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를 믿어주지 않았다고, 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그런 네게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나 많았지만 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이별을 말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 상황을 맞닥뜨린 너의 선택은 결국 나와의 이별이란 것을 알기에 너를 잡을 수도 없었다. 평소와는 반대로 내가 너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은행잎을 밟으며 경사진 길을 올라가던 그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그저 팔짱을 낀 듯 안 낀 듯 어정쩡하게 너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여 널 잡고 싶어질까 차마 너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남자치곤 작은 편이었던 네 손을 내 손 가득 잡고 나면 나는 이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네게 다시 매달릴 것만 같았다.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3분 후 도착 예정이었고, 너는 조심스레 내 손가락을 잡아보았다가 내 뺨을 꼬집어보다가 마지막으로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귓가에 남긴 채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을 했다. 너의 어머님께서 아프시기 시작한데다, 우리의 부서진 신뢰가 가져온 이별이었다.

처음 이틀은 생각보다도 덤덤했다. 너와 이별했던 날, 엄마는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나보다도 더 크게 취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 앞에, 8년간 차마 부모님께 하지 못했던 너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널 너무 사랑했기에 결혼할 때까지도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싶었던 너의 조건들. 엄마는 언제고 이렇게 될 것 같았다며, 8년간 한 번도 인사를 오지 않았던 너를 탓했다. 너에 대한 비난은 아프기도, 얼마간 수긍되기도 했다. 그렇게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이별 전부터 지쳐있었던 내 마음도 인정했다. 너와 나의 성향 차이는 서로에게 큰 스트레스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곁을 쉽게 내주지 않는 너의 모습들은 나를 정말 외롭게 했다. 사실 이별하기 두 달쯤 전부터는 네 입에서 나오는 ‘결혼’이란 단어를 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또 다시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 원룸을 얻어 조용히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사는 삶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 네가 없는 건 많이 슬펐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너 역시 결혼을 뱉으면서 너 혼자 자유로이 사는 삶을 더 많이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리고 3일째, 새벽에 몇 번을 네가 없는 상실감에 눈을 떴다.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쥐고 흔들었다. 각오했었던 이별이라 해도 아픔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너를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잡기 위해 편지를 썼다. 네게 미안하다고, 혼자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어머님 아픔 같이 짊어지자고,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 11월 초에 연락 달라고, 기다리겠다고 편지를 쓰고, 피로에 약한 너를 위해 영양제도 챙겨서 너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그렇게 달아났다.

이틀간 덤덤했던 나를 비웃듯 밤만 되면 너와의 이별이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하루에 한 시간도 채 잘 수 없었다. 잠들만 하면 불안해서 깨고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지쳐 잠들곤 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공황이 찾아왔다. 중증 우울증을 진단받으면서도 끝내 거부했던 약이었는데 결국 그렇게 약을 먹게 되었다. 약을 먹고 나서야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고, 회사에서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아주 조금 내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너와의 이별을 입에 올리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나는, 혼자 견딜 너와는 다르게 나를 아껴주는 좋은 사람들이 내겐 아직 많다며 위안을 받곤 했다.

입버릇처럼 너와 재회하고 싶다 말했던 나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재회를 입에 올릴수록, 소망할수록 우리의 이별이 더 강하게 마음에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너의 집 앞 문고리에 편지와 영양제를 걸어두고 달아났을 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네가 내린 결정을 책임질 것임을. 그 날 신촌에서의 이별이 우리의 진짜 이별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이별을 받아들이고 진짜 나의 시간을 찾아야 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올리고, 이력서를 쓰고 그렇게 내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했다. 나는 정말로 편집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 수업들을 다 듣고 책을 읽으며 살았으니까 더 늦기 전에 결과를 내야만 했다. 그런데 책을 두 페이지 넘기다 네 생각에 거꾸러졌다. 우리 서로 성향이 달랐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많지 않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도 지난 8년은 나를 쥐어짜고 쥐어짜도 네가 흘러나올 만큼 너로 가득 찼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린 참 숨바꼭질 같은 인연이었다. 너는 늘 자유롭길 원했고, 나는 늘 네게 확신을 요구했다. 나는 계속 당겼고 너는 계속 밀어냈다. 내가 지칠 때쯤 너는 날 당겼고, 내가 반색하며 다가가면 다시 멀어졌다. 서로에게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불안정한 채로 8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그만큼 서로를 마음 깊이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득히 쌓아 올린 상처와 원망과 분노들 그 사이에서도 정말 많이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이었다 믿고 싶다.

다만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연애에서 나를 지키지 못했다. 포기하지 못하는 꿈을 제외하고 모든 걸 네게 맞추려 애썼다. 한때는 그 꿈조차 버리고 너를 안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나의 꿈을 그저 취미라 부정하는 너의 말에 상처받으면서도 네 손을 놓지 않았었다. 등 돌리는 너를 기다리며, 잠수타는 너를 기다리며 내 마음속에 생겨난 공백을 너에 대한 것들로 채웠다.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내 눈을 가렸다. 그 결과 나는 나를 지키지 못했고, 우리가 사랑했던 사실과는 별개로 우리의 연애가 건강한 연애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랑한다면 무조건 맞추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사실 이별한 지금도 너를 만나기 이전의 신은빈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오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했던 옷, 좋아했던 노래, 좋아했던 음식, 너를 만나기 전 스물여섯 살의 신은빈이 가졌던 소망들과 세계를 하나씩 찾으며 나를 회복해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곧잘 넘어질지도 모른다. 네게 익숙해져 있는 발걸음을 버리고 나면 휘청거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걸어야 하니까 종아리에 힘을 주고 버텨보려 한다. 언젠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거라 믿으며 우리의 오랜 숨바꼭질은 이제 여기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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