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을 떠올리면 크로키 북(스케치북보다 얇은 종이로 묶어진 책. 채색보다 간단한 스케치를 하기에 적합하다)이 생각난다.
왼쪽 어깨 끈으로부터 시작되어 오른쪽 골반쯤에 걸쳐있던 검정색 크로스백, 그 안에는 늘 크로키 북과 필통이 들어있었다. 그 가방과 한 몸처럼 보이던 검정 혹은 회색 계열이 주류를 이루는 오버사이즈의 바지와 점퍼, 녀석은 교복이 아닐 땐 늘 한가지 스타일의 옷만 입었다. 고운 선을 가졌던 얼굴의 이목구비 위로 미술 쌤의 무리한 과제를 클리어 할 때마다 수줍게 피어나던 소년같은 미소. 오늘은 그 얼굴이 보고싶다.
녀석과의 첫 만남은 미대를 가고 싶다며 미술 학원을 찾아 왔던 고2 시절이다. 미술 실기를 전혀 배워본 적 없던 녀석이 서울에 있는 실기 수준이 높은 애니메이션과를 가고 싶다며 상담을 해왔었다. 입시를 치르기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학교 성적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장함이 있어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녀석만을 위한 강도 높은 수업이 시작되었다.
녀석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학원으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4시간, 방학 때는 12시간 수업을 하면서도 주말에는 부족한 실기 시간을 메꾸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내주었다. 기초과정을 떼고 드디어 인체의 여러 동작을 그려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섰을 때 녀석에게 평일엔 인물 크로키 10장씩, 주말에는 50장을 그려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녀석은 군소리 없이 과제를 해왔다. 평일엔 소파에서 티비 보는 아버지,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 등 가족의 일상적인 모습이 담기더니 주말이면 4호선 지하철에 앉아 서울까지 왕복으로 다녀오는 동안 수많은 승객의 모습을 열심히 크로키 해왔다. 첫 번째 크로키 북의 그림은 사람의 비례도 동작도 모두 어설펐지만, 크로키 북이 쌓여갈수록 녀석의 크로키는 점점 선 맛이 살아나고 인물의 특징이 잘 담기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미술학원 선생님들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마다 만나는 녀석의 크로키 북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했었다.
녀석은 다음 단계, 그다음 단계도 어김없이 클리어 해냈다. 그렇게 성실한 2년을 보내고 목표로 했던 서울에 있는 대학 에니매이션과에 들어갔다. 녀석이 2년간 보여준 열정과 훌륭한 결과물들, 여러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후배들에게 회자되곤 했었다. 나는 그 녀석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성실함과 집념이 그 어떤 재능보다 무섭다고 덧붙이곤 했다. 이후 10년을 더 가르쳤지만 녀석처럼 성실하게, 강도 높은 훈련을 통과하며 원하던 목표를 이룬 학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늘 녀석이 생각났고 몇 년에 한 번씩은 안부를 나누곤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올라오는 소식을 보며 녀석이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해내고 있구나, 어느새 나이가 이렇게 들었구나, 오늘은 혼술이네... 늘 가까이 있는 것처럼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올해는 생각지도 않게 스승의 날 선물을 보내와 와락 반가움과 고마운 마음을 건네고 ‘잘 살다 만나자’라는 메시지를 주고 받았었다. ‘네’라고 대답하곤 꾸벅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었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녀석이 하늘나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노무시키...!
아무 말도 안 나오고 그저 ‘이노무시키’만 입에서 수십 번 맴돈다. 선생님 허락도 없이 누가 먼저 가래. 선생님이 내준 과제는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잘 해내던 녀석이 처음으로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떠나버렸다. ‘잘 살다 만나자’고 건넸던 말은 녀석이 받아주지 않아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충격과 슬픔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날이 벌써 1년 전이다. 1년 간 녀석의 페이스북을 몇 번은 들락거렸던 것 같다. 피드를 거슬러 올라가다 끄적거리며 그렸다는 오래전 그림에서 눈이 멈췄다. 25년 전, 녀석이 그렸던 수천 장의 크로키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이십 여 년 전 물감 냄새 가득한 그 공간으로 나를 이동시킨다. 구석 책상에 앉아 한번도 엉덩이를 떼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열 여덟의 녀석이 보인다. 그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는 20대의 나도 보인다.
수고했다. 정말 애썼다.
* 매달 13일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를 썼고 얼마 전 <모두의 입양>을 출간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가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에 잡히는 디자인으로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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