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학생은 자신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 특별한 삶에 대한 동경과 본인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사실 막연하기보다는 나름 그에 맞는 노력과 성실함도 갖추었다. 저녁 급식을 먹기 위해 줄 서는 시간도 아까워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다. 출출함을 때우기 위해 준비한 드림파이(Dream pie)라는 초코과자 봉지의 드림을 매만지며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주관까지 있었다.
부모님의 칭찬과 선생님들의 칭찬, 노력하는 만큼 나오는 것 같은 성적과 주위의 인정이 이런 쳇바퀴 도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 에너지는 특별한 삶에 대한 환영을 빔프로젝터처럼 머릿속에 행복하게 재생시켰다. 이것은 삶에 열정적이던 시절의 필자를 돌아보는 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 장면과 지금을 연결하는 다리 사이에는 엄청난 절벽이 있다. 원하던 진로로 진학하지 못하여 스스로 빠져버린 움푹 파인 그 시절을 고개 숙여 살펴보면, 우울함과 열등감, 절망과 좌절, 쳐다보기만 해도 균형을 잃을 것 같은 짙은 어둠이 있다.
지금 MZ세대는 경쟁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회의 교육에서 칭찬은 우월감의 씨앗이 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특별함을 추구하게 하는 교육은 어딘지 이상하다. 모두가 빛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칭찬으로 쌓은 이미지는 실패할 시, 낙담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어떻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켜야할까?
아들러 심리학에 따르면, ‘격려하기’는 인간의 성장을 돕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한다. 칭찬이 엔진이 되는 것과 격려가 엔진이 되는 것은 다르다. 칭찬이 마냥 나쁜 건 아니지만, 칭찬이 주는 부작용도 분명히 있기에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칭찬이 누군가의 열등감을 조장하거나, 능력 만능주의로 흐르는 방향이라면, 분명 좋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이다. 칭찬이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킬지 경계해야 한다.
어둠이 깔린 절벽에서 지금의 평지로 발을 딛고 올라오게 된 것은,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뒤부터이다. 그때부터는 칭찬을 걸러 듣기 시작했다. ‘멋지고 특별한 나’에 도취 되지 않고, 일희일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못나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시 도전해 보자, 최고가 아니어도 삶의 한 부분이 행복으로 채워지면 됐어, 우리 이번 도전으로 진심으로 즐거웠다. 격려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성장하는 원동력 삼았다.
작은 봉지에 담긴 하리보를 한입에 털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면 구석구석 숨어있는 우울함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다. 칭찬은 하리보만큼이나 달콤한데, 달콤함은 자꾸 갈증을 일으킨다. 칭찬을 받은 아이는 더욱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칭찬을 받은 아이는 사랑 받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등 여러 불안이 해소되고, 자꾸만 갈구하게 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면서도 많이 싸우는 시간이 경쟁형 게임을 할 때이다. 눈에 보이는 점수와 현란한 플레이가 도파민을 자극할 때, 실력과 점수를 칭찬받을수록 아이들은 더 잘하고 싶어진다.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실력이 뒤처지거나 소극적인 학생들을 향해 비난을 쏟아낸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는 신체적능력이 뒤쳐지는 학생, 특히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같은 편이 되기를 꺼려한다. 각자의 인격이 아닌, 게임에서의 역할과 쓸모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기는’ 마음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를 도와주는 마음을 발견해서 격려해주면 사뭇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공격을 양보한 학생에게 “공을 넘겨준 덕분에 소외된 친구가 공격 기회를 얻어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구나. 고마워요.” 또는 교사가 반 전체에게 직접 일관된 격려를 해주고, “이기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겁니다. 우리 반은 잘 할 수 있을거라 믿어요.”와 같은 격려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사실 여기에 몸개그를 보여주고 맹렬하게 점수를 잃은 친구가 생기면 더 효과적이다. “져도 괜찮아 덕분에 우리 모두 웃고 행복했다.”와 같은 멋진 멘트를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기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경쟁은 과열되며 얼굴이 시뻘개지고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랠리 상황에서 갑자기 다가온 자폐를 가진 친구에게 공을 양보하기도 하고, 실점한 친구에게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멈칫하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의 말을 전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더 나은 가치가 무엇인지 잠깐 고민하는 상황에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다. 그 짧은 순간, 격려의 말은 행동의 지표가 된다. 승패가 아닌 순간을 공유하여 추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한 행동이 반복되면 이대로 아이들의 삶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된다.
우리가 기성세대의 모습들을 보고 자라며 문제의식을 느꼈듯, 파릇파릇 자라나는 알파 세대도 날카로운 시대를 지나는 MZ세대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고 손 쓸 수는 없었는가 책임을 묻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사실, 무한 경쟁과 무관심에 익숙하고 개인주의가 편한 MZ세대 교사로서 알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다정하고, 낙담과 좌절을 쌓아가지 않고 서로 격려해주는 세상이길 바란다.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어두운 세상을 밝게 지나가는 힘이 생기면 좋겠다.
* 글쓴이 - 고운
아이들은 이 조그만 교실 사회에서도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서며 성장한다. 그런데 유독 자꾸만 같은 곳에서 넘어져 상처가 되는데, 그곳에 엄청 커다란 코끼리가 멀뚱히 서 있다. 교실 속 코끼리를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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