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간다면, 그를 더 깊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 거리에서는 아코디언과 탬버린을 이용한 신나는 민속 음악부터 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 첼로와 바이올린 듀오의 연주까지 골목마다 다른 결의 음악이 끊임없이 흐른다. 아름다운 선율이 거리에 깔리고 손에는 색색깔의 젤라또, 그리고 와인과 함께 하는 티본 스테이크까지. 피렌체는 슬그머니 지쳐버린 사랑까지도 샘솟게 할 만큼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피렌체에 도착하고 다음날, 그곳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 근처에서 홍콩 친구들인 J와 C를 만나기로 했다. J와 C는 이번에 결혼하는 탱고 친구들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탱고를 추기 시작한 시기도 비슷해서 마음이 가까운 친구들이다. J와 C는 피렌체보다 아래쪽 지방인 피엔자에서 웨딩 스냅을 찍고 피렌체로 넘어온다고 했다. 나와 남편도 코로나 기간에 결혼한 탓에 제대로 된 신혼여행을 못 갔던 터라 ‘우리도 온 김에 스냅 사진이나 찍자!’하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진을 예쁘게 찍기 위해 미리 준비해 간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안 하던 화장품도 두어 개 더 바른 뒤 의기양양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야 해도 아침밥은 포기할 수 없지.’
이탈리아는 대체로 호텔 조식들도 맛있다던데 정말이었다. 식재료가 좋아서인지 빵을 대강 데워서 크림치즈만 발라 먹어도 맛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산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는 딱딱한 고소한 맛이라면, 이탈리아 크림치즈는 정말 크리미했다. 크림치즈가 크리미해서 ‘크림’ 치즈인 걸 서른 살을 훌쩍 넘겨서야 알다니. 약간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책 많이 읽어봐야 크림치즈 맛도 제대로 모르는걸.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 번째 접시를 비웠다. 사진 찍는 건 잊은 지 오래였다.
맛있게 먹고, 피렌체 광장 회전 목마 근처에서 사진 작가님을 만나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물을 코끼리처럼 마시면서 유럽의 햇볕에 옷이 다 젖어갈 즈음, 스냅 사진 일정이 끝났다. 때마침 J와 C가 우리의 마지막 촬영 장소 근처에 도착했다고 했다.
J와 C를 기다리는 10분 정도 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3년 사이에 애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J는 여전히 장난을 많이 치고, C는 여전히 차분하고 청순할까. 주차장에서 애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조그만 하얀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오고 있었다. 운전하는 J를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저렇게 한 손만 핸들을 쥐고 흥분한 모습이라니. 무척 위험해 보이는 J를 보면서 역시 그간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방방 뛰며 차에서 내리는 J를 보면서 “와! 너 해외에서 운전하다니 어른 다 됐다!”라고 두어 번 정도 입바른 소리도 했다.
C는 여전히 예쁘고 청순했는데 어쩐지 J와 비슷해진 느낌도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실제로 mbti가 신랑감 J와 똑같아졌다고 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원래 자기는 내향적인데 최근에는 계속 외향형으로 나온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를 만나자마자 기쁨의 댄스를 추는 둘을 보면서 사랑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커플이다.
사실 우리의 여행은 ‘나폴리 탱고 페스티벌’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친구들은 웨딩 스냅을 목적으로 둔 여행이기도 했지만, 나와 남편의 경우에는 친구들 따라 오랜만에 같이 탱고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거였다. 코로나가 막 시작했을 무렵에 우리 두 커플은 이스탄불 탱고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국내 상황이 안 좋았던 우리는 직전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못 간 아쉬움 반,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 반에 나와 남편은 한껏 들뜬 상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탱고는 춤 실력도 아주 수준급이지만, 거기에 보다 그들만의 ‘짙은 정서’까지 깔려 있다고 했다. 탱고 음악 자체의 서정적 분위기도 중요하겠지만, 탱고를 추는 땅게로스들의 감정선도 춤의 깊이를 다르게 만든다. 그래서 탱고를 오래 춘 사람들은 탱고를 출 때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서가 표정에서, 온몸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이탈리아 땅게로스들의 정서는 어떨까, 춤 스타일은 어떨까’ 궁금했다.
나폴리 탱고 페스티벌은 낮에는 유명한 탱고 댄서들의 수업이 있고, 오후에는 카프리 섬 앞까지 가는 큰 여객선에서 탱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밀롱가가 열린다. 그리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유럽 3대 갤러리 중 하나라는 움베르토 1세 갤러리아 건물 지하에서 밤새도록 춤을 춘다. 하지만 나와 친구들은 순도 탱고 100%의 여행은 지양하기로 했다. 일종의 ‘탱트밸(탱고 앤 트래블 밸런스)’을 지향하자고 약속했다. 종일 탱고를 추는 것도 좋지만, 처음 가본 이탈리아 남부를 둘러보는 것은 그 자체로 황홀한 일이니 말이다.
항상 마음에 담아 두었던 남부 해안가 포지타노(Positano)로 향했다. ‘Isla de Capri’라는 프레세도의 탱고 음악을 들으며 해안 도로를 달리다 보니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은은하게 석양이 내리던 시간,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작은 색색깔의 레고를 조립해 놓은 듯한 마을. 모든 게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남편은 운전하던 차를 잠깐 도로변에 세웠다. 나와 친구들은 방방이를 타듯 도로변을 뛰어다녔고, 남편은 챙겨간 드론으로 영상을 찍었다. 여행 전날까지 일에 파묻혀 살아야 했던 날들의 피곤함이 태양빛 아래 레몬 샤베트처럼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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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나폴리의 탱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로마에서의 탱고까지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저의 기억력과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쪼록 즐겁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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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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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여행과 사랑과 우정, 그리고 탱고가 함께라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부럽습니다. 행복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황홀함이 마구 느껴지는 반짝이는 글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읽는 분들도 같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셔서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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