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연습_사랑의 인문학_정지우
“친밀감을 가지려면 사람을 믿어야 한다. 상대에게 본인이 느끼는 걸 말하고 자기 자신을 열어보여야 한다. 그러한 행동은 초기 애착 경험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감정적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사랑을 지키는 법> 중에서)
미네소타 대학의 심리학자인 앨런 스루프(Alan Sroufe)의 말이다. 어린 시절의 부모와 아이간 애착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이런 원칙은 인생 내내 이어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친밀감을 느끼려면, 먼저 그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회생활 속 관계라는 것에서 그런 믿음이 가득 피어오르기란 쉽지 않다. 보통은 가능하면 솔직한 감정들을 숨기기도 하면서, 서로 경계하고,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것을 감추면서 ‘적절한 거리’ 속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적당히 숨기고, 딱 서로가 편안한 선에서 거리두며 관계 맺는 기술은 우리 인생의 상처와도 관련되어 있다.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 혹은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누구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얻게 된다. 인생에 공통된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제관계든, 부모와 자식간이든, 누구나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 상처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상대를 ‘믿기’ 보다는 상대를 적절히 ‘경계’하는 방법을 익혀나간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그런 기술은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적당히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면서, 크게 상처줄 일 없이, 안전한 거리 안에서 타인을 만나는 일들이 필요할 때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그런 거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의심이나 방어의식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을 믿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믿음의 순간을 넘어야, 나 자신부터 상대를 믿을 수 있게 된다.
사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대개의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색과 밀고 당기기, 서로에 대한 단점은 감추면서 장점으로 매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스펙 비교, 각종 조건에 대한 탐색, 성향이나 성격에 대한 기초적인 파악이 끝나고, 비로소 사랑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점점 더 믿음이 필요해진다. 상대를 믿고 차츰 나의 솔직한 측면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혹시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 감추었던 부분들도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다 그런 측면들까지 비로소 상대가 받아들여준다고 믿게 되면서, 우리는 진정한 친밀감을 느끼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단순히 멋지고 이상적이었던 상대방은, 나의 ‘친밀한 곁’이 되어간다. 진정한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일종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결단의 능력이다. 거절당할 수 있다는 위험,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을 위험을 향해 자기의 마음을 집어 던지는 일이다. 앨런 스루프는 이런 ‘믿음의 능력’이야말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관계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유아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애착, 즉 농도 높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을 믿고, 모험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상대를 믿고, 자기를 내어줄 수 있다.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건 능력이다. 그 능력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밀한 관계’들을 만들어낼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린 시절 부모나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그럴 능력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은 결코 절대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운명이 있다면, 누군가 결국에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에 그 믿음을 연습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그 사랑 속으로 들어서기 위한 믿음의 연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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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문학'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을 썼습니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쓰면서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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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콩
믿는 연습도 필요하겠지만 믿고싶지 않아도 믿게되는 그런 특별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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