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너무 자유로워서 되려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이상했다.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는 일찍 기울어졌다. 오후 다섯 시가 막 넘어가고, 하루치 일을 마무리한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밖으로 나왔더라. 아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낯선 버스를 타고 익숙한 동네로 향하며, 나는 길게 이어진 강변도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안에는 병이 있었다. 작은 병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삶의 균형을 무너트리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괜찮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더 집중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냥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니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졌다. 부모님이 계신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자주 찾지 않았다.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한 없이 풀어지던 마음에 최소한의 긴장이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일까. 결국엔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오랜 습관처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친구가 걱정을 할 정도로 오래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약을 챙겨 먹고, 깨어있는 시간에는 계속 글을 썼다. 가끔 집중이 되지 않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 때는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일부러 출퇴근 시간은 피했다. 꽉 막히는 도로도 싫고, 무미건조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날 두 눈에 담긴 퇴근길은 상상했던 것만큼 우울하지 않았다. 길게 누운 그림자를 끌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오히려 무척 씩씩해 보였다. 버스에 멈출 때마다, 승차를 위해 그림자와 잠시 떨어진 사람들의 발아래 노을빛이 차였다. 귀를 기울이면 차박, 하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전에는 왜 이런 생기로움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나름의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유일한 이유라고 한다면 내가 느끼는 일상의 변화가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출근하고 퇴근하던 일과에서 그러지 않는 시간으로, 끊임없이 차오르던 강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의 변화. 절반의 선택과, 절반의 우연과, 또 절반의 체념과, 어쩌면 절반의 절반의 절반의 다시 절반쯤의 기대로 닿았던 오늘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것도 그저 자의식 과잉일 뿐이라서, 자신 외에 모든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일상’으로 치부하는 그릇된 상상력일지도 몰랐다. 마치 자신은 그들과 다른 영역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착각이나 착시. 그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 긋고, 금 너머 존재를 바라보며 혼자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마냥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됐다. 버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좌석이 다 찰 무렵 승차한 남자 세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모두 비슷한 정도의 곱슬머리에, 한 명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들은 출구 근처에 나란히 서서 담소 나눴다.
마스크 사이, 쌍꺼풀이 짙은 눈을 보고서야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걸 알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소 어두운 톤의 피부색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차창으로 스며든 노을은 우리를 평등하게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그 속에 함유된 성분이,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융해시키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이따금 귓가에 닿았다. 노을 빛 속에서도 언어는 견고하게 형태를 갖췄다. 물론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에,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을까 막연히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재잘거리는 말투나 잦은 웃음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편안함을 몰래 공유해볼 수 있었다.
내가 쓰는 글도 노을빛이라면 좋을텐데. 태양이 가장 밝은 시간은 정오지만 오히려 태양이 가장 멀리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곳에 떠있는 빛은 모든 것의 기준을 명확히 했고, 그래서 차마 마주볼 수 없는 열기로 그 시간을 지배했다.
반면 해질녘의 시간은 모든 걸 평화롭게 만들었다.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보다는 끝내는 마음에 가까운 상태. 그 짧은 순간만큼은 태양마저 그윽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봐주었다.
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평화로운 시간은 금세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바람은 더 차가워질 것이다. 늦은 일을 마친 사람들은 거리의 어둠만큼이나 두려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에게 해질녘의 시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이제는 믿을 수 조차 없게 된 이야기는 아닐까.
창문에 고개를 기대며 내가 맞이할 밤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일까. 눈을 감고 더 깊은 어둠으로 지금을 넘겨버리는 일 밖에 없는 걸까. 그렇게 지나가면, 내일의 나는 또 어떤 일상을 낯설게 느끼게 될까.
그때는 덜컥 겁이 나다가도 막연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이상했다. 그래도 기억하고 싶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모인 버스 안에서 찾았던 다정함이나, 타인의 일상으로 녹아들던 순간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절반의 절반의 절반의 다시 절반쯤의 기대도 잊지 않고 싶었다. 당장 약속을 어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너무나 글을 쓰고 싶게 만들던, 루이보스를 닮은 석양의 향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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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는 글쓰기' 글쓴이 - 허태준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라는 책으로 담았습니다. 지금은 부산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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