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는 그림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통역의 키 포인드다.
그녀는 진실을 듣는 유일한 존재이며,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다.“
엘리는 오늘도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에 붙여 놓은 소설 ‘통역사(Interpreter)’ 속 문구를 혼자 중얼거리 듯 읽어본다. 소설 속 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수님께 들었던 인상적이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문장이기도 했다. ‘통역사는 그림자여야 한다.’ 보통 통역사는 좁디 좁은 박스같은 동시통역 부스 안에 들어가서 아예 보이지 않거나, 연사들 뒤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노트테이킹을 하며 조용히 존재한다. 그래서 그림자라는 말인가? 네 번째 회사에서 인하우스(In-house), 상근직 통번역직으로 일을 하고 있고, 프리랜서 시절도 지나온 지금, ‘통역사는 그림자다’는 그녀의 직업을 정확히 관통하며 묘사하는 단 한줄이 되었다.
차분하고 차가운 교수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동시 통역현장에서든, 순차통역 현장에서든 통역사가 배석되는 모든 회의나 컨퍼런스가 끝났을 때, 통역사는 참석자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지 않아야 해요. 그만큼 자연스럽게 연사나 양측의 화자에 녹아들어서 통역을 잘 해야한다는 것이죠. 통역을 잘해서 통역사의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1,2 초의 잠깐의 정적이나 작은 실수가 현장을 얼어붙게 만들죠. 그 뒤는... 말안해도 짐작이 될 거에요“
엘리는 사실 그림자 역할이 무척이나 좋다. 존재를 드러낼 필요 없이 조용히 뒤에서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것. 자신의 이야기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몹시나 어려운 그녀의 성향에 이렇게나 맞는 일도 없었다. 훌륭한 그림자가 되자! 매번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유지하는 일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순간의 작은 실수는 온 청중의 이목을 이끌어 그림자속 통역사를 꺼내고 만다. 잘못된 단어 선택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중요한 계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 생각하기도 끔직한 그 후 폭풍의 무게는 통역사의 몫이다. 무사히 잘 해내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한 번의 실수는 전부가 되어 모두에게 기억되어 낙인으로 남기도 한다. 화상회의가 많은 요즘, 그 실수는 회의 내용과 함께 언제 까지고 저장된다.
문득 잊고 싶은 악몽같던 순간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정부부처와 동아시아 지역 한 국가와의 MOU 체결식 현장이었다. 관계부처 처장님과, 체결국 장관님과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엘리는 통역전에 항상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는 편이다. 해외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긴 했지만 마지막 졸업학기만 본교에서 보내면 되는 과정이었다. 국내파라는 자격지심이 항상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대학시절 연수조차 다녀오지 않은 통대생은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대학원 입시준비를 하면서도 해외파 수험생과 스터디를 할 때면 괜히 종종 주눅이 들곤했다.
자격지심을 극복하려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필요한 모든 자료를 준비해놓고(이 과정에서는 담당자를 귀찮게 해야 하기도 한다), 돌발상황과 이에 대처할 시나리오까지 그려 놓는다. 통역 현장은 일단 시작되면 생방송 현장과 비슷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는 물론이고 통역 대상자가 저명한 인사면, 인터넷을 다 뒤져 최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유튜브를 검색해 연사의 스피치를 여러 번 들어 고유한 발화적 특징에도 익숙해지려 한다.
그날도 사전에 파악가능한 MOU 내용을 숙지하고, 컨퍼런스 장 내 화장실에 앉아 ”아!에!이!오!우!”를 세 번쯤 발음하며 입근육을 풀고, 입에 볼펜을 물고 참고 자료로 찾아놨던 영문을 소리내어 읽어보며 혀도 대차게 풀고 난 뒤 진행자석 바로 앞쪽에 마련된 통역사석에 앉았다. 드디어 체결식이 시작되었다. 사진 찍는 소리와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 그리고 여기저기 서있는 녹화중인 카메라들. 몹시나 불편한 방해물이다. 행사는 사전에 약속된 절차에 따라 잘 진행되었다. 협약식은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잔뜩 긴장한 엘리의 손 덕에 볼펜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처음 전문적인 수준의 통역사로 배석된 일정이 개회식에 국무총리까지 다녀간 3일간 진행되는 큰 규모의 국제행사였으니, 엘리는 일정 내내 초 긴장 상태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상대국 장관의 인사말이 남았다. 귀를 종긋 세우고 손에 힘을주어 펜을 잡아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듣고 있는 언어가 영어가 맞는건가? 엘리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싱가폴 친구의 영어를 듣고 당황한 했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3분이 넘도록 계속된 장관님의 스피치 중 반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국가 언어의 엑센트가 강하게 베어서 영어 엑센트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정말 새로운 언어가 탄생한 것 같았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눈물도 덩달아 흐를 것만 같았다. 정신이 혼미한 사이 장관님의 스피치가 끝났다.
보통 통역은 연사가 말을 마친 후 3초내에 시작 되어야 한다. 3초가 넘어가면 청중들은 통역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5,6초는 족히 흘렀다. 노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있던 엘리는 사람들의 화살같은 눈길을 느끼고는 정신을 부여 잡는다. 일단 통역을 시작했다. 도입부는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출발했다. 다음 부터가 문제다. 얼기 설기 띄엄띄엄 적었던 노트 내용을 바탕으로 그녀는 '내가 장관이다' 최면을 걸어보며, 체결국 장관이라면 이 현장에서 전했을 법한 내용을 버무려 넣어 간단하게 간신히 마무리 했다. 이어지는 행사 마무리 통역까지도 잘 끝냈다.
엘리는 사람들 눈을 피해 조용히 일어났다. 왜 마지막 장관님 인사말을 그렇게 짧게 통역했냐고 타박하듯 물어올 것만 같았다. 모두 괜한 염려였다. 참관했던 한 관계자는 오히려 행사를 빨리 끝낼 수 있도록 그녀가 정리를 하며 통역을 잘 했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엘리는 그날 저녁 이어진 오찬에서 호화스런 코스요리 속 그렇게나 좋아하는 스테이크도 거의 먹지 못했고, 주체 측에서 마련해준 호텔에 돌아와 이불과 베개에 화풀이를 하며 다음 날 통역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여전히 그림자를 벗어났던 그 몇 초의 시간은 엘리의 마음에 화석처럼 남아있고, 전부다 소화하지 못했던 장관님의 이야기도 궁금하기만 하다. 그때를 생각하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물론 지금의 엘리는 여유로워 졌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한 회의를 통역하다 놓친 부분이 있으면 다시 확인하여 물어본 후 이어간다. 조금은 뻔뻔해지기도 했고, 수 많은 현장에서 여러 국가의 사람들과 다양한 종류의 통역 경험이 쌓이면서 영어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 세계 인구 약 77억명 중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3억 5천명 정도이다. 모국어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14억명이 넘는 인구의 모국어인 중국어이다. 한편, 영어를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제3의 언어)은 13억 5천명 정도라고 한다. 즉,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원어민 만의 영어를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엘리는 사실 영어권 연사를 통역하는 일정이 잡히면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청취의 장벽하나는 건너 뛰고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역사라면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태가 언제고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대비하며 다양한 액센트 및 단어에 적응해야한다. 또한 이코노미스트를 읽으며 뉴욕타임즈를 읽으며, 애써 공부했던 멋들어진 단어를 뽐내서도 안된다. 영어 통역은 원어민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중은 다국인일 경우가 많다. 엘리는 어느 동시 통역사의 통역을 들으며 영어 좀 하는 듯한 청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치 자기도 할 수 있을 듯 하다는 듯 으쓱거리며 “저 통역사 영어통역내용 생각보다 쉬운데“. 이에 ‘이렇게 쉽게 무리없이 청중을 이해시키는 통역이 정말 잘하는 통역이에요’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 참았던 기억과 함께.
영어권 국가 사람들 끼리도 서로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리고 여러 국가들에서 참석한 초청 인사들도 서로 Excuse me? Sorry?로 되물으며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엘리는 이를 시작으로 영어를 잘 하고 싶어하고, 영어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영어 이야기를 펼쳐내고 싶다. 영어는 원어민만의 언어가 아니라고. 그러니 꼭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소제목 : Allie 의 '통역 그리고 영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영어 그리고 통역에 관한 에세이
글쓴이 : ‘순수국내파 통역사로 먹고살기’를 썼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세상과 세상, 언어와 언어사이의 소통을 도우며 살아가며, 세상과 사람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기도 소망해봅니다. 아이들과 학생들이 재미있게 영어를 익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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