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조금 넘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일자리를 구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일종의 직업훈련원이었다. 각종 기업체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기술훈련과정 외에 필라테스나 집단상담 같은 비기술 과정도 몇몇이 있었다. 강좌명이 ‘대인관계와 의사소통’이었던 내 수업도 그중의 하나였다. 정식 분류는 기초직업기술훈련이었지만, 정작 훈련보다는 놀이에 더 가까운 집단활동을 하곤 했다. 조를 나눠서 게임을 한다든지, 운동장에 나가서 각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발표회를 연다든지, 일정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든지, 이렇다 하고 한 번에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활동과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은 비단 내 수업내용뿐만이 아니었다.
수강생 구성도 그랬다. 수업을 맡기 전 훈련원 측에서 내게 알려준 강의 대상은 분명 ‘장애인’이라는 단어 하나로 명명된 ‘단일 대상’이었다. 그러나 추상적 개념을 넘어 구체적 개인으로 정체를 드러낸 ‘장애인’들과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매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단일 대상이 단일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부터 환갑이 넘은 사람까지,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부터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까지 몽땅 한 교실에서 내 강좌를 수강했다. 귀가 안 들리는 수강생, 눈이 잘 안 보이는 수강생, 손을 쓸 수 없는 수강생, 다리를 쓸 수 없는 수강생,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수강생, 투석을 받는 날마다 하루를 꼬박 쉬어야 하는 수강생, 박수 소리만 들으면 일어서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하는 수강생, 갑자기 졸도해도 놀라지 말라고 매번 예고하는 수강생, 모두가 한 교실에 앉아 내 강의를 들었다. 어떤 시청각 자료를 마련하든 한 번에 전달하기가 어려운 수업이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장애인이라는 그 납작한 단어 하나로 눌러버린 힘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다양함’ 자체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다거나 사로잡는, 내 수업의 동력이기도 했다. 내가 이해받기를 원하는 이상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수업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실 안 수강생끼리 얼굴이 익고 인사가 살가워질 무렵, 수강생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조금씩 내놓기 시작했다. 지금은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왕년에는 잘 나가는 운동선수였다는 이야기, 아들을 죽도록 팼던 과거를 지금도 후회한다는 이야기, 장애 판정을 받고 나서 바로 죽으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지금껏 살아있다는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매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중의 누구, 단 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수강생들의 눈에서 불이 켜지는 것을 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함께 분노했고 그리고 함께 울었고 때론 함께 웃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상대방의 이야기가 내 것과 진배없이 공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그래프를 그려서 발표하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수어로 말하는 수강생 한 명이 유년시절 ‘그룹홈’에서 자란 이야기를 막 마친 참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빚더미를 짊어지게 되었다던가, 학교에서 왕따로 지내왔다던가, 평생 할머니와 살아왔다는 이야기도 큰 동요 없이 듣던 수강생들이 새삼스럽게, 마치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다른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역시 수어로 말하는 동료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발표자를 에워싸서 그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수강생 한 명 한 명이 예외 없이 대단한 불운을 짊어진 사람들이었는데, 웬만큼 독특한 상황도 고개 끄덕끄덕 공감하던 사람들조차 숙연하게 만든 ‘그룹홈’이라는 불행이, 유난히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진짜로 ‘그룹홈’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매달 1일 ‘그룹홈 보육사 일기’
글쓴이 –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다섯 아이들과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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