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친구는 ‘화목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잘 자란 맑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 친구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류의 사람을 이상형의 조건 중 하나로 이야기했다. 누구나 소위 행복한 부모 아래에서 사랑을 많이 받아 밝게 자란 사람을 동경하고, 또 만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녀 역시 그런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상처받은 사람은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고, 꼬여있고,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거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이 말이 싫었다. 내가 그 ‘구김살 있는’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환경에서 얻어맞은 것이 왜 꼬리표가 되는지 억울한 마음도 슬며시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부모님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고성이 자주 오가고 밥그릇이 날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자였던 아버지와 숨죽이고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늘 긴장하며 지냈다. 언제 또 싸움이 시작될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어 무기력했다. 종종 아이답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 어른들이 ‘어디 아프냐’고 묻는 일도 많았다.
어릴 적의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쫓아왔다. 성장기의 트라우마, 특히 학대나 폭력과 같이 관계에서 상처를 깊이 입은 사람은 자기 감정을 알아차리거나 조절하는 힘이 약해지기도 한다. 대개 트라우마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거나 분출해버리는 등의 기제를 쓰는데, 그 상황을 벗어난 후에도 이 기제를 자동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분노나 두려움, 원망은 고이 접어두는 것이 안전한 대처법이었다. 그대로 화를 냈을 때 그 밥그릇이 나를 향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갈등이 있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 감정을 습관처럼 눌러버리곤 했다. 스스로 화가 났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화를 내며 나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넘겨버리고, 나중에서야 뒤늦게 부글거리는 마음이 올라와 후회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불안감이나 분노도 어린 시절의 무엇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 막막해졌다.
성장하면서 겪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우리 삶에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남기는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일상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트라우마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불안감이 계속될 때에는,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명이 붙는다. 전쟁이나 교통사고를 겪은 사람이 당시의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른다거나, 자신에게 폭행을 가한 사람과 비슷한 목소리나 체구만 보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어붙는다거나 하는 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고나 폭력과 같은 사건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여전히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다.
상처에 빠져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만큼 누구보다 마음을 돌보는데 노력을 쏟았다. 상담이나 기도시간과 같은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공간에서 눌러뒀던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라는 원망스럽고 화가 나는 마음도 함께 울컥 올라왔다. 기억을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상담가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두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훨씬 담담해진 어투로 당시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에 허우적거리던 내가 그 주변 어딘가로 빠져나와 한 발 멀리서 그 시절을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보였다. 폭력의 위협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던 내가, 소란스러웠던 밤 미안하다며 내 등을 쓸어주시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라면 응당 집안 모든 일을 책임져야한다는 압박 속에서 무력한 가장이 될까 불안해하던 아버지의 고통 또한 보였다.
‘집안일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 통했던 시절, 가정이라는 성역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는지, 어머니는 왜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어머니들과, 힘을 제한받지 못했던 아버지들과, 숨죽이며 지냈을 아이들 또한 헤아려졌다. 어찌 할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존해낸 사람들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져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인생의 고통이란 것이 각기 다른 모양을 했을 뿐 모두의 삶에 고르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새 도려내고 싶었던 기억도, 마주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내가 겪어온 무덤덤하고 즐겁고 평온했던 여느 시간들처럼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상처가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나를 끌어안을 수 있었고, 내 고통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갈등 앞에서 경직된 내 방어기제에 걸려 넘어지곤 하지만, 이 또한 조금씩 유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트라우마를 잘 겪어낸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사실 PTSD 상담의 기본 줄기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본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고통이 자기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자기만의 필터로 해석한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하고 또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에 대한 새로운 삶의 원칙을 세울 수 있다. 나와 세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결국 자기가 원하는 삶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통을 지나온 이들의 가장 큰 힘은,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괜찮아질 거야,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겪었잖아?’라며 스스로의 힘을 믿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또 다른 상처와 어려움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복의 힘에 기대어 무던히 마음을 살피고 돌본다면, 그 고통 또한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리라 믿는다. 세찬 비에 어지러이 흩어졌던 흙이 마르면서 더욱 땅을 단단히 굳히는 것처럼 말이다.
* 매달 5일 '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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