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은 사람 마음을 알 길이 없어 애가 타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별 관심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 길 물 속과는 달리, 물 위의 파도는 사람 속 만큼이나 알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서핑을 시작하고서 가장 막막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파도 보는 것이었거든요. 서핑 고수들은 그날 파도를 보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는 같은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겠더라구요. 아마 서핑 초보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겁니다.
파도 좋고 햇볕 좋은 날이면 이곳 남캘리포니아의 해변들은 어김없이 서퍼들로 가득 찹니다. 라인업에서 서퍼들과 둥둥 떠 있다 보면, 갑자기 서퍼들이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어딘가로 몰려갈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멀리서 큰 파도가 오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겁니다. 파도를 타기에 좋은 자리를 잡거나 다가오는 큰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더 멀리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말이죠!
그런데 라인업이 뭐냐구요? 참, 여러분이 아직 열심히 화이트워터를 잡고 있을 때라는 걸 깜빡했네요.😅 깨지기 전 상태의 파도인 그린웨이브를 잡기 위해서는 좀 더 멀리 바다쪽으로 나가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파도가 너무 작으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서퍼들은 파도가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가 되는 곳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그 곳에 일자로 형성되는 라인을 라인업lineup이라고 합니다. 화이트워터를 졸업한 서퍼는 라인업에서 파도를 기다리게 되죠.
다시 파도를 읽는 이야기로 돌아와서, 서핑에서는 파도의 움직임과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좋은 자리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파도를 잡을 전략을 세울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좋기 때문이죠. 비교적 여유있게 잡을 수 있는 화이트워터와 달리, 파도가 깨지기 전에 그린웨이브를 잡으려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바다를 봐도 뭐가 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파도는 커질 것 같더니 금새 잠잠해지기도 하고, 어떤 파도는 내쪽으로 올 것 같더니 다른 곳으로 가 버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갑자기 파도가 솟아 나오는 것 같은 때도 있죠.
그럴 때는 파도가 참 사람의 마음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복잡하고,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알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백색소음처럼 수많은 파동이 넘쳐나는 바다에서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유의미한 신호를 읽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도 오래 지내보면 어렴풋이 그 마음을 헤어릴 수 있듯, 파도도 차분히 오래 보다 보면 감이 오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해변의 지형, 그날의 바람, 해류와 물때 등 다 파악하기 어려운 요인들에 따라 달라지는 파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서 어떤 경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을 읽는 데 심리학이 도움이 될 수 있듯, 파도를 읽는 데도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한 곳에서 바다의 색이 조금씩 변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파도가 올라오면서 빛이 다른 각도로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죠. 이렇게 파도가 올라오는 걸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잘 알아채려면, 처음에는 파도 하나하나를 너무 쫓으려 하기보다는 눈의 힘을 풀고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보는 법을 주변시라고 합니다. 천문학자들이 밤하늘의 별을 더 잘 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파도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그 파도가 위로 올라오며 커지는 속력, 앞으로 움직이며 나아가는 속력, 그리고 방향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파도가 내가 탈 수 있는 될성부른(?) 떡잎인지 판단할 수가 있죠. 여기에는 왕도가 없어서, 다양한 파도를 많이 보고 직접 부딪혀 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파도는 크기는 하지만 힘이 없어서 잡기 어려울 때도 있고, 어떤 파도는 작아서 도저히 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힘과 속력이 좋아서 잘 잡히기도 합니다. 내가 본 파도에 직접 몸으로 부딪혀 파도의 힘을 느껴 봐야 봐야 그 파도의 모양과 힘을 연결지을 수 있죠.
어떤 파도가 좋은 파도가 될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좋은 파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이트워터를 갓 졸업한 초보가 서핑하기에 좋은 파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초보가 도전하기에 좋은 0.3m-0.6m 정도 되는 파도입니다. 사진에 표시된 것처럼, 파도가 가장 높은 부분을 피크peak라고 하고, 그 옆의 깨지지 않은 부분을 숄더shoulder라고 합니다. 아직 화이트워터를 잡는 입문자분들은 파도가 깨지는 부분 앞(사진에서 카메라가 있는 쪽)에서 기다리다 다가오는 화이트워터를 잡으면 됩니다. 그린웨이브를 잡으려는 분들은, 라인업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있는 위치에서 파도가 깨지기 2초에서 5초 정도 전에 피크나 숄더 부분에서 파도를 잡으면 됩니다. 사진에 보이는 상태보다 조금 더 일찍 잡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팝업이 늦어서 파도가 너무 높아지면 보드 뒷쪽(테일tail)이 들려 고개를 물에 처박게 될 수 있으므로, 파도가 완전히 올라오기 전에 잡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코를 박는다는 뜻으로 노즈다이브nosedive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파도가 타기에 이상적이지는 않습니다. 바람이 사방팔방으로 강하게 부는 날에는 파도가 갈라지고 힘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아 파도를 타기 어렵습니다(영어로는 챠피choppy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도가 윗 사진처럼 한쪽에서 깨지기 시작해 옆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일제히 깨지는 때도 많죠. 그런 파도나 현상은 한꺼번에 닫혀 버린다는 뜻으로 클로즈아웃closeout 이라고 합니다. 이미 깨진 후에 타는 화이트워터의 경우에는 클로즈아웃 파도도 상관없이 탈 수 없지만, 파도가 깨지지 않은 부분을 따라가며 옆으로 타는 그린웨이브는 일직선으로 깨져 버리면 앞으로 나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탈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파도가 다 위의 분류에 들이맞는 것은 아닙니다. 피크와 숄더의 구분이 불명확한 파도도 있고, 어떤 파도는 지형과 상황에 따라 깨져서 화이트워터가 되었다가도 다시 그린웨이브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파도는 타기에 충분히 커진 상태에서 깨지지 않고 한참을 나아가기도 합니다. 어쨌건 내가 타고 즐길 수만 있으면 다 좋은 파도라고 할 수 있죠!
서핑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셨다면 아직 그린웨이브를 타기에는 이를 수 있지만, 파도를 보는 눈은 언제 길러도 좋습니다. 처음에 잘 안 보인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계속 바다에 나가 바라보고 부딪혀 보면 언젠가는 파도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사람의 마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지만, 타인의 마음이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 괴로울 때는, 바다에 나가 파도와 씨름하다 보면 언젠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때가 있더라고요. 한 발치 멀리에서 바라보고, 또 계속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는 작은 파도도 알아챌 수 있게 되듯이, 사람의 마음이 보내는 신호도 바라보고 부딪히는 걸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잘 알게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 파도를 잡아야 할 지 말아야 할지는 여러분의 판단입니다. 🌊
* 글쓴이 - 지민웅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게임회사에 다니며 취미로 음악과 서핑을 하고 있습니다. 서핑을 시작한 지는 2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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