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 이런 대참사! 허둥지둥 버스를 따라 뛰었지만 오늘따라 하이힐 신은 걸 후회하며 뛰기를 멈췄다. 오늘따라 안 타던 버스를 탔고, 오늘따라 안 들던 간식 가방도 있어 손에 든 게 많았다. 오늘따라 친구와의 통화가 재미있어서 버스를 타고도 끊지를 못했다. 오늘따라 오늘따라가 많은 날이었다. 꼭 그런 날 사고가 난다.
노트북 가방을 잃어버리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 사실 두 가지였다. 찾을까 말까. ‘찾아야지’ 하는 마음이 당연할 줄 알았는데 한참을 버스를 따라 뛰었다가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가 건너편에 가서 그 버스인 것 같아 잡아탔다가 다른 버스도 타봤다가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해보고도 별 수확이 없자 긴장했던 어깨가 툭 떨어지더니 한숨이 휴 나오면서 ‘그냥 말까?’ 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당장 새 노트북을 살 여유도 없고 노트북에는 소중한 사진들과 작업했던 자료도 한 가득인데 이대로 포기하겠다고?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김관장(탁구밖에 모르는 탁구관장 남편을 부르는 나만의 애칭이다)과 사춘기 딸 둘이 노트북 없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자꾸 물었다. 이대로 못 찾는 거냐고 자꾸 확인했다. 짜증이 났다. 그들은 순전히 궁금해서, 날 위로하려 묻는 말이었지만 이미 반포기로 마음을 굳힌 나에게는 꼭! 반드시! 찾아내라는 공격의 포화 같았다. 나는 뭔가 해볼 것처럼 내일 운수회사에 다시 전화해보고 안되면 CCTV라도 보여달라고 하겠노라 호언장담을 하곤 방문을 걸어잠갔다. 전화는 해볼 수 있겠지만 운수회사에서 나한테 순순히 CCTV를 보여주겠어?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걸 잃어버린 사람치고는 잠을 푹 잤다.
다음 날은 코로나 2차 백신을 맞았고 미열이 나서 며칠 앓았고 시골에 계신 시아버님이 아프셔서 시골에 다녀왔다. 그렇게 노트북 없이 일주일을 살았다. 회사에선 다른 컴퓨터를 사용했고 집에선 글쓰기를 중단했고 나는 그새 새 버전의 아이패드를 검색하고 있었다. 앗! 이건가? 이참에 12.9인치 대화면을 자랑하는 프로 5세대 아이패드를 사고 싶었던 것인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김관장이 경찰에 신고하면 찾을 수 있다며 탁구클럽에 나오는 현직 경찰의 조언을 전해줬다. 나는 솔직히 경찰에 신고하는 일에는 반신반의였다. 경찰이 이렇게 사소한(?) 분실물 찾기에 적극 나서줄 것 같지 않았다. 이건 살인 사건도 아니잖아! 운수회사에서 이미 없다고 한 물건을 무슨 수로 찾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물건을 꼭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요즘 부쩍 사이가 좋아지고 있는 김관장과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김관장 말을 따르기로 했다. 큰맘 먹고 그날 당장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다. 점유물이탈횡령죄 관련 신고로 접수가 되었다. 죄목도 후덜덜했고 강력 2팀을 찾아가는 길도 긴장감 백배였다. 하지만 정작 형사님을 만나보니 그들도 그저 나를 돕고 싶어 하는 친절한 동네 주민일 뿐이었다. 형사님은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자, 잘 들어보세요. 제가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갈 거냐 하면요,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면 교통카드 사용 내역을 알 수 있거든요. 버스 승하차 시간과 버스 번호판 번호도 알려줄 거예요. 그걸로 운수회사에 CCTV를 요청할 겁니다. 만약에 누군가 노트북을 가져갔다면 그 사람이 교통카드를 찍었을 테니까 그걸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어요. 금방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고 카드사에 전화해서 정보부터 알아내서 저한테 알려주세요.” 대단히 구체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듣자 나도 머릿속에 큰그림이 그려졌다.
경찰서를 나와 곧장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내가 탔던 버스와 승하차 시간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껏 내가 버스 번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타본 버스였고 통화를 하다가 모르는 정류장에서 갑자기 내리는 바람에 버스가 헷갈렸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내가 허위 신고를 했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그나저나 그 순간에도 혼날 걱정을 먼저 했으니 나의 이 몹쓸 소심함이여. 나는 진짜로 내가 탔던 버스의 운수회사에 전화를 했고 안 그래도 노트북을 하나 보관하고 있으니 어여 좀 찾아가라는 싱거운 말을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 나는 잃어버렸던 노트북을 다시 켜고 글을 쓰는 중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는데 나는 용감은커녕 잘 모르는 일 앞에서는 포기가 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김관장의 잔소리와 채찍질(?)이 없었다면 지금쯤 내 노트북은 운수회사의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테고 내 책상에는 새 아이패드가 놓여 있었을 테지. 그러나 그것이 우리집 경제 사정으로 봤을 때 긍정적인 일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노트북을 다시 찾고 나서, 나는 사춘기 딸 둘에게 한편의 영웅서사를 들려주듯 엄마의 활약상(?)을 들려주며 아이들이 앞으로 겪을지도 모를 수많은 분실 사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나름의 조언을 날려주었다는 사실이 가장 뿌듯했다. 사실 아이들에게 소중한 내것을 잃어버린 엄마의 자세가 ‘그냥 포기’로 비쳐지는 것이 내심 걱정이었기에 못이기는 척 김관장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새 아이패드는 날아갔지만 아이들에게 더 소중한 무언가를 주었다면 인생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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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 신선숙
15년차 출판기획편집자입니다.
소심한 편집자로 인생 마감할 줄 알았다가 운동선수 출신 남편을 만나 인생공부 새로 하는 중입니다.
남의 글만 편집하다 내 글은 2021년부터 조금씩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쓰는 글은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김관장과 산다는 것>(가제)을 출간해보고 죽는 것이 인생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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