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말수의사

계절이 바뀌고, 말도 나도 바뀐다_수상한 말수의사_김아람

2024.12.09 | 조회 942 |
0
|
세상의 모든 문화의 프로필 이미지

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폭실폭실한 억새가 제주 전역에 피어나고, 세상은 온통 베이지 빛 들판이 전부였는데, 어느새 한라산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고, 존재감으르 못느꼈던 동백나무에서 드디어 동백꽃이 새빨갛게 꽃망울을 열어대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한 살 먹는구나 라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아쉬우면서도, 오히려 이 지독한 자연의 루틴이 한편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준다. 그렇게 죽을 것 같던 하루도 결국 지나갈 것이며, 또 새로운 하루가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사소한 것에 샐쭉거리는 나의 숨을 고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말도 역시 바뀌어간다. 갓 태어난 망아지부터 노령으로 삶을 다하는 말까지, 제주에서는 조금 더 다양하게 일생의 한 시절을 살아가는 말을 보다 직관적으로 볼 수 있다. 예전에 경마장에서 일할 때는, 항상 같은 나이대의 비슷한 말들이 선별되어 와서 그들만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은 그냥 딱 비슷한 정도의 체중과 체급, 딱 그 정도의 질환과 행동 패턴을 가지는 일관된 이미지로 나에게 존재했었다. 하지만, 이곳 제주는 다르다. 선별된 운동선수인 경주마가 실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자랐으며, 또 어떻게 늙고 아파가는지에 대해서 보다 더 민낯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첨부 이미지

얼마 전 올해 태어난 망아지들이 잘 훈련받기 위해서 이곳에 입소했다. 마치 엄마 품에만 있었던 아이가 어린이집에 처음 온 것처럼, 키 작은 망아지들이 한 곳에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보니 그냥 피식 웃음이 났다. 다들 올망졸망하게 한 마리씩 방에 들어가 있고, 조그만 소음에도 제법 귀를 쫑긋 세우며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사람의 손길을 조금씩 타면서, 하나둘씩 사람과 친해지는 훈련도 하고, 그러다 사람이 올라타는 것에도 익숙해질 것이고, 점점 달리는 훈련에 익숙해질 것이다. 짧다면 짧은 1년 동안 이 녀석들은 무궁무진한 폭풍 성장을 마치고 제법 쓸만한 제 역할을 하며 이곳을 졸업할 것이다. 

봄
첨부 이미지

제주도에는 망아지도 많지만, 또 나이가 많은 말들도 많다. 경주마로서 현역 생활을 제법 잘한 말들은, 은퇴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번식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암말은 임신을 해서 또 후손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씨암말로서 남은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경주마를 은퇴한 후 이 말이 원래 태어났던 제주의 한 목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씨암말로서 용도를 전환해서 살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수말 역시 씨를 제공하는 씨수말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한다. 

여름
여름

나는 이곳에서 현역 보다나는 나이가 있는 상태의 번식마로서 이들을 주로 만나게 된다. 최근에 내원했던 씨암말이 있다. 지금은 오랜 질병을 거치며 힘도 없고 볼품도 없지만, 예전 경주마 시절 사진을 보니 정말로 빼어난 몸매와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사람 역시 같을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천진난만한 망아지로 엄마를 따라다니다가, 어느새 성마가 되어서 인생 최고 전성기 시절을 거친다. 그 찬란한 시절은 그 누가 건강하게 빛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세월은 또 정직하게 흘러가고, 결국 하나 둘 현역에서 벗어나며 사그라들며 때로는 급작스럽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결국 모두 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가을
가을

나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방관자 또는 관찰자 같기도 하다. 물론 조금이라도 고쳐보며 덜 아프고, 더 오래 쓰도록 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신의 시계를 내가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건 자명한 논리이다. 그저 지금 내가 부딪친 이 환경 속에서 내가 할 일을 최대한 해볼 뿐이다. 작다면 작은 말 세상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부품으로써 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낮 부품 하나일 뿐인데, 때로는 내가 너무 과하게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과하게 애착을 갖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아프고 속상하다.

속상할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것 역시 자연이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심한 안갯속에서도, 다음 날 피부가 따가울 만큼 쨍한 햇빛을 가지고 오는 햇볕 속에서도, 말들은 오늘도 똑같은 포즈로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희한하게 복잡한 마음이 그냥 자연스럽게 평안해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 예술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평안함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겨울 
겨울 
첨부 이미지

사람보다는 조금은 더 빠른 말의 인생 사이클을 매년 반복하며 보며, 나는 그 지독한 자연의 규칙 속에서 예전보다는 조금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계절이 바뀌면서 말도 자라나고, 나도 늙어간다. 그걸 충분히 느끼며 내일을 또 살아갈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한 연말의 어느 날이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

'세상의 모든 문화'는 별도의 정해진 구독료 없이 자율 구독료로 운영됩니다. 혹시 오늘 받은 뉴스레터가 유익했다면, 아래 '댓글 보러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주신 구독료는 뉴스레터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운영하는 데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상의 모든 문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4 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메일리 로고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