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정말 녹아내릴 것 같네. 6월인데 원래 이렇게 더웠나? 라며 갑작스레 찾아온 더위에 지쳐 있던 참이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워싱턴 도심에 있는 한 초등학교 앞에 설치된 링컨 밀랍 동상이 녹아내렸다는 거다. 의자에 앉아 있던 링컨의 머리가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럴만도 하다. 지난 2주동안 최고기온이 계속 30도를 넘어갔다. 34도, 35도, 36도. 체감온도로는 40도가 넘어가는 날도 허다했다. 지난주엔 교육청에서 주말 야외활동을 전면 취소한다는 문자도 보내왔다. 마침 6월 중순 방학을 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6월 둘째 주에 있었던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날도 33도가 넘었던 것 같다.
고개가 뒤로 꺾인 동상의 사진은 순식간에 온라인에 퍼져나갔고, 언론과 개인 소셜 미디어는 앞다투어 이 소식을 전했다. 매체마다 나름의 해석이 더해졌다.
녹아내리는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이 주말의 우리 모습 같았다며 너무 빨리 찾아온 6월의 태양아래 흐물 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을 표현하기도 했고, 며칠 전 있었던 대선 토론을 보며 느낀 실망감을 링컨에게 대입하려는 시도들도 보였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적인 의견도 있었다.
머리, 다리, 그리고 발, 동상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중계하듯 서술한 기사도 있었고, 작품을 만든 설치미술가인 샌디 윌리엄스(Sandy Williams IV)의 “왁스 회사에서는 60도에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는 어찌보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을 만한 인터뷰를 인용한 기사도 있었다.
동상이 녹아내렸다는 사실이 예상치 못하게 주목을 받자 동상 설치 프로젝트를 담당한 문화재단 Cultural DC에서도 재빨리 움직였다.
문제는 이미 발생했고, 해당 작품은 원래 8월에 철수하기로 되어있었으니, 그대로 두고 아예 이 해프닝을 프로젝트 홍보에 사용하자고 마음먹은듯했다. 일단 작품이 더 훼손되기 전에 동상의 머리 부분을 분리했고, 두 블럭 떨어진 사무실에 보관중이라는 유쾌한 어조의 담당자 인터뷰를 보며 "아, 이게 미국의 마인드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기금을 활용한 프로젝트가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을 했을법도 한데, 그런 의견이 강한 목소리로 표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 동상이 왜 세워졌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재미있는 건, 지금 녹아내린 이 동상이 지난 가을엔 다른 이유로 녹아내렸었다는 사실이었다.
왁스로 만든 이 동상에는 심지가 여러 군데 심어져 있다. 관람객들이 직접 불을 붙이고 촛불이 켜진 시간동안 의미를 되새겨보기를 바랐던 작가의 의도를, 누군가가 작품 공개 전에 활활 태워버렸다고 한다.
100여개가 넘는 심지에 한번에 불을 붙여 동상이 그을음으로 가득해졌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도모르게 “말도 안돼!” 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동상이 이번엔 자연에 의해 녹아내렸다니. 말 그대로 "세상에 이런 일이"다.
원래도 방학이 끝나 학생들이 돌아올 다음달이면 철거될 예정이었고, 아직 이른 철거가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라는 기사의 문구는 홍쇼핑의 매진임박 자막처럼 다가왔다.
동상이 사라지기 전에 직접 보고싶다는 마음은 시간과 체력을 끌어냈다.
마침 동상이 위치한 초등학교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스쿠터를 타고 동상을 찾아 나섰다.
초등학교 간판을 보고 스쿠터를 세웠다. 동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자 익숙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선생님 더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은 아쉽게도 낮 기온이 그리 높지 않아서인지 해를 받고 있는데도 겉 표면이 물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전 사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보였다. 동상을 살피는동안 나처럼 동상을 보러 온 사람을 발견했다. “너도 이거 보러 왔구나!” 라며 동지의식을 나눴다.
일명 ‘녹은 링컨(Melted Abe Lincoln)’은 정말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기후변화의 한 장면일까, 아니면 단순히 재료의 속성을 잘 파악하지 못한 미술작품이 날씨에 의해 망가진 해프닝인걸까.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 해프닝 덕에 링컨이 자주 찾았다는 캠프 바커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우연이 만들어낸 순간에 감사해야 하는걸까.
[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를 썼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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