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6개월, 이유식을 시작하자 공교롭게도 엄마 밥을 챙겨먹기는 더 힘들어졌다. 좋아하던 햄버거를 만들어 먹을 시간도, 야채 잔뜩 넣고 만든 토마토 스프 만들 시간도 없어졌다. 아기 맘마 챙기다 보면 엄마는 본인의 밥을 차리는 것에 의지를 잃기 십상이다. 남편이 아침 공복에 씨리얼 말아 먹는 걸 몸에 좋지 않다고 말리던 내가 주린 배를 쥐고 씨리얼을 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기는 점점 엄마 껌딱지가 되어가고 있다. 가드가 쳐진 놀이 매트에서 놀다가 엄마가 매트에서 한 발이라도 나서려고 하면 아기는 눈치채고 울기 시작한다. 잠깐 사이 시원한 커피를 한 잔 내려서 돌아오면 아기는 놀이매트 입구에 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이럴 때 나는 남편에게 배운 대로 드라마 <추노>의 OST를 크게 부르며 아기에게 다가간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마법 같은 음악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아기의 표정은 드라마 <추노>의 주인공 장혁과 닮았다. 이맘때 아기들은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불안해할 아기를 위해서 잠깐 화장실에 갈 때에도, 기저귀를 가지러 갈 때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얼른 돌아와 아기를 안아들자 아기는 벌게진 눈으로 품에 안겨 나의 옷깃을 꼭 쥔다. 짧은 시간 동안 무럭무럭 자란 모습이 기특하다.
오늘은 아기가 잠들고 나면 수업 준비를 해야지.
오늘은 아기가 잠들고 나면 이유식을 만들어야지.
오늘은 아기가 잠들고 나면 뉴스레터를 써야지.
오늘은 아기가 잠들고 나면 원고 마감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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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안 자지...?)
아기를 돌보는 시간에도 마음 한편에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출산 직후 혼자 집에 고립되는 느낌이 싫어 조금씩 일을 재개했고, 글쓰기 일정도 미뤄놓지 않았다. 아기가 자랄수록 육아가 수월해질 줄 알았는데 육체노동의 강도는 신생아 때보다 훨씬 고단해진 느낌이다. 파워J 엄마는 매일 육퇴 후 일정에 대해 계획한다. 하지만 시시각각 자라는 아기가 엄마의 계획대로 움직일 리 없다. 예상치 못한 4개월에 이 두 개가 나느라 밤새 이앓이를 하고, 5개월이 되자 예상과 달리 앉고 기기 시작했으며 6개월이 되니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앉았다가 다시 눕는 법을 몰랐다. 잠결에 앉은 아기는 깊은 밤, 잠에 취해 맹맹 소리를 내면서 엄마를 찾았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면, 엄마가 계획대로 일을 해낼 수 있는 날은 아기를 자정까지 돌보다 가까스로 남편과 바통 터치에 성공한 날이었다. 계획이 성사된 것은 기쁘지만, 그런 날은 엄마가 부족한 잠을 더 부족하게 자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자정부터 엄마가 아닌 ‘나’로서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마저도 불확실하다니. 파워J 엄마는 육아의 고된 노동 강도보다 여기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할 일을 제때 끝내지 못했을 때의 낙심도 낙심이지만, 잠시도 쉰 적이 없는데 계획대로 완성되지 않은 결과물을 보면, 어쩐지 멍텅구리가 된 느낌이다.
아기를 돌보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리 계획형 인간이라도 계획 같은 건 통하지 않으니, 계획을 세우지 말자고 계획했다. 문제는 아기를 돌보는 것 외에 세워둔 글쓰기나 일 같은 다른 계획들이, 아기를 돌보다 보면 무너지는 일들이 태반인 사태였다. 늦은 밤, 이유식을 만들어야 할 시간에 캄캄한 아기방에 아기와 누워 아기가 곤히 잠들기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조급하다.
오늘은 대체 몇 시에 잘 수 있는 걸까.
눈도 침침, 마음도 침침하다. 아기는 오동통한 손으로 내 체온을 느낀다. 그러다 금세 스르르 긴장이 풀려 꿈나라로 간다. 내게 의지하고 있는 이 작고 가련한 생명체에 불현듯 말도 못 할 사랑이 샘솟는다. 전방으로 전진한 볼살, 소금빵 모양을 한 팔다리, 보드랍고 말랑하면서 적당히 단단한 딱딱이 복숭아 같은 이 존재를 품에 넣고 있으면 세상에 더 이상 소유하고 싶은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이다.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계획이라는 굴레에 꽁꽁 싸인 미이라 같은 엄마 말고, 조금 더 유연한 엄마가 되어보자는 목표. 아기를 품에 넣고 다짐한다. 꽤 오랜 시간을 캘린더 빼곡하게 시계처럼 살아왔지만 내가 아기의 주양육자가 된 이상, 변화가 필요하다. 아기의 변화에 맞춰 내 일상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까지 잘 자던 잠을 빽빽 울며 버텨도 당황하지 말기, 잘 먹던 이유식을 뱉어서 세 번쯤 다시 만들어도 지치지 말기, 백색 소음 취급하던 청소기 소리에 놀라 엄마하고만 꼭 붙어있으려고 해도 의젓하게 받아들이기. 그리고, 세워둔 모든 계획에 조금 더 유연하고 관대해지기.
유연함에서 오는 새로운 가능성을 두 팔 벌려 환영하기.
변화는 힘들고 어렵지만, 창조성과 가능성이 행운처럼 뒤따르기도 한다. 나는 아마도 아기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조금 더 유연해질 때 나는 더 새롭고 주름살이 하나쯤 더 적어질 거라고 믿는다. 파워J 엄마, 이번 기회에 유연함에 도전해 보는 거다.
* 글쓴이 - 보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하다가 23년 12월 출산 후 <육아에 바나나>로 돌아왔습니다. 의지하고 싶은 가족 품에 있다가 지켜주고 싶은 가족이 생긴 요즘입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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