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회사(북하우스)에서의 업무를 나는 간략히 ‘가내수공업’이라 칭하곤 한다. 기획도 내가 해, 편집도 내가 해, 번역도 내가 해...... 기획은 주로 에이전시 레터를 통하거나, 외국에 거주하는 기획위원님이 보내주신 책 자료를 검토해서 책을 선정하곤 했다. 내가 편집을 하면 사장님이 직접 오케이 교정을 봐주셨는데, 덕분에 편집 경력 만랩의 사장님에게 많이 배웠다. 영어와 독일어 책인 경우 번역도 내가 직접 했는데, 으음, 과연 이래도 되는지 살짝 양심에 찔리곤 했다. 사장님은 아마 내가 어린이 책 정도는 거뜬히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뽑으신 게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보니 그래도 나 이 정도면 일당백 아니었는가?
그렇게 고오급 인력이었던 내가 아마 그 회사에서 세 번째 책을 만들 때였을 것이다. 상상력이 가득 담긴 재미있고 오밀조밀 예쁜 그림책을 내놓게 되었다. 윤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사장님한테 칭찬도 받았다. 회사에서 나름 미는 책이 되었다. 책 장정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표지에 푹신푹신한 스폰지를 넣고, 책의 각진 모서리를 둥그렇게 처리하는 ‘귀돌이’ 제작을 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책이었다.
책이 다 만들어지고 본사에 입고되는 날, 그날은 편집자에게 책을 만들면서 가장 기분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내 피땀의 결실을 직접 손으로 받아보고 만져보는 날이니까. 문학동네는 책이 나오면 전 직원들에게 책을 증정한다(북하우스는 문학동네 계열사로 같은 건물을 썼다). 그렇게 책이 한 바퀴 회사를 돌더니, 문학동네 어린이 팀에서 근무하시는 팀장님이 사장님을 찾아갔다. 사장님, 이거 저자 제목이 잘못 표기되었는데요? 뭣이?? 잔니 로다리가 꽤 유명한 작가인데...... 이름이 잘못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때 직급만 팀장이었지 고작 2년 차 사원이었고, 사장님이 내 팀장 역할을 해주시던 때였다. 고오급 인력은커녕 그림책에 대해선 1도 모르던 사람이 나였다. 사실 ‘잔니 로다리’라는 이름도 책을 만들면서 처음 들어봤고, 그가 이탈리아의 저명한 그림책 작가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표지에는 정말로 잔니 로다리의 이름이 잘못 박혀 있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잔니 로다니’였거나 ‘잔느 로다리’였거나 하지 않았을까...... 그날은 내 출판 경력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날이 되었다. 본사에 뿌려진 책을 모두 거둬들이고 다시 제작하기로 했다.
책을 제작하는 데 수백만 원이 들었는데, 다리가 막 후들거렸다. 머릿속이 새까매지면서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이렇게 출판계에서 영영 묻혀버리고 마는 건가...... 그 당시 제작부장으로 계시던 A 부장님이 나를 위로해주셨다. 고우리야, 어쩌니...... 가끔 있는 일이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다음부턴 이런 실수 안 하면 되지. 괜찮다, 괜찮다...... 눈물이 날 뻔했지만 씩씩하게 말했다. 뭐 어쩌겠어요, 부장님, 제 월급에서 까야죠! 매달 조금씩 월급에서 까면 되지 않겠어요?
북하우스 사장님은 몸집은 작은데 여장부 기질이 있으신 분이다. 나를 불러 데이터 수정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허허 웃으셨다. 저자 이름 잘못 들어간 거 나도 못 봤네, 내 잘못도 있다, 하셨다. 호되게 혼날 줄 알았던 얼떨떨했다. 아니, 사장님, 이렇게 넘어가도 되시겠어요? 괜찮으시겠어요?! 잘못했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앙~~~
그해 연봉 협상이 있던 날 사장님이 그랬다. 고팀장, 내가 월급 많이 올려주려고 했는데, 그 실수가 컸어. 이번엔 조금밖에 못 올려주겠다. 그래도 잘했어요. 사장님은 월급을 조금밖에 못 올려줬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매우 만족했다. 내가 보기엔 큰 금액으로 연봉이 올랐다.
우와, 지금 생각해도 살 떨리는 경험을 했다. 그 책이 시중에 돌았더라면, 회사 망신은 톡톡히 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것일까? 그 후로 오탈자 따위는 내지 않는 완벽한 편집자가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죄송합니다...... 그 후로도 한두 번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책을 다시 제작해야 할 만큼 큰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완벽한 편집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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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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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생생한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독자에게 책의 편집자는 그림자처럼 가려진 존재라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책 한권이 나오기까지 편집자 분들이 얼마나 고군분투 일하시는지 느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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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편집자는 가려져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끔 알아주시는 독자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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