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불행한 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 10대에 접어들자 우리 집이 다른 집과 비교되기 작했다. 왜 친구네처럼 우리는 외식을 자주 못하는지, 어머니는 큰어머니처럼 집안 인테리어를 고민하거나 하릴 없이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낼 수 없는지, 드라마 속 가족처럼 저녁상에 둘러앉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 때마다 불편해졌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집은 초라했고 어머니는 늘 가사와 부업으로 분주하셨고 큰소리가 문 밖을 새어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남들에게 꺼내는 것은 더 싫은 일이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를 그저 그런 집의 아이로 볼까봐, 부모님을 비난할까봐, 집안 사정 때문에 속앓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꼭꼭 숨기고 싶었다. 친구들에게는 체육 시간은 어떻게 빠져나갈지, 유행하던 가방을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지가 가장 큰 고민인 것 같았다. 그런 고민쯤은 내가 가진 갈등에 비하면 가벼워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교내에 기독교 동아리가 있었다. 음악 선생님의 비호 아래 한 주에 한 번씩 예배모임을 하는 동아리였다. 내 또래가 유독 많이 들어왔다. 남녀 성비도 적당한 우리 아홉은 종종 음악실에 모여 CCM을 듣거나 연주하고 방학에는 수련회나 봉사를 같이 다니곤 했다.
그러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음악실에 모여 있던 우리는 하나 둘 자신의 가족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찾아온 빚과 가난, 가출한 어머니, 딸이라서 받아야 하는 차별까지, 마치 누가 얼마나 불행한지 내기라도 하듯 털어놓았다. 늘 밝고 쾌활해보였던 친구들에게 그만큼 깊은 고통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도 진심 어린 눈빛을 만나서인지 아무도 모르길 바랐던 내 이야기를 꺼내는 용기를 냈다. 누군가가 울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숨죽여 이야기를 들었고 이야기가 멈추는 곳에선 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더듬더듬 서로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 후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치부를 꺼낸 후, 이 친구들에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우리는 야간자율학습 시간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중간고사를 마친 오후 분식집에서, 주말 교회 골방에 모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 때는 몰랐다.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이 아픈 기억을 재구조화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던 것을 말이다. 처음에는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들었던 사건도 이야기를 하고 또 하다보면 어느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느꼈던 고통이 옅어졌다. 그 상황에서 아버지의 모습도 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려졌고, 어쩌면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건의 의미를 어렴풋이 더듬어갔다.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마음이 상해 오면 우리는 또 열심히 그 마음이 아물 때까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야 느그 아빠 또 그랬나?” 친구들은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우리는 같이 부모를 원망했다가 또 안쓰러워했다가, 분노와 이해하는 마음이 뒤섞인 한탄을 쏟아놓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갈등의 한복판에 있는 서로를 딱하게 여겨주었다. 이들 곁에 있으면 나는 불행을 떠안고 홀로 떠 있는 섬이 아니었다. 우리는 캄캄한 정글 속에 있지만 모닥불 곁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온기를 나누는 무리 같았다.
대학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동아리에서 만난 우리는 진한 수다를 열망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공도 달라서 매주 가까스로 시간을 맞춰 만남을 이어갔다. 살아온 여정부터 성격의 취약점, 진로 고민까지 우리는 매번 더 깊숙이 있는 무언가를 꺼내 보이면서 관계를 쌓아갔다. 다정함을 갈망하지만 선천적으로 무딘 성격이 고민인 K, 자기회의감과 늘 싸우게 된다는 J, 싫은 소리가 너무나도 싫은 나까지. 우리는 서로가 무엇에 열광하고 또 무엇을 겁내고 언제 힘들어지는지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하루는 강의가 비는 시간에 맞춰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점심도 거르고 부랴부랴 늦지 않게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번잡한 학생회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약속한 시간을 훌쩍 지나서야 친구들이 도착했다. 나는 불쑥 “너네 짜증 나”라고 내뱉었다. 아마 허기져서 더욱 거칠게 발화되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약속을 늦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해 보이고도 싶고 또 상대를 미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꾹꾹 누르던 말이었다. 어쩌다 그런 말을 꺼냈는지 스스로에게도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의 표정이 어쩐지 환해지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날선 표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나의 치졸한 마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후에도 여러 번 확인시켜주었다. 외로움, 질투, 두려움과 같은 끈적한 감정을 고백했을 때에도, 소심하고 뭉툭한 면을 드러냈을 때에도 ‘나도 그렇다’며 맞장구쳐주었다. 내 방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서랍을 열어 보였을 때, 그들은 성큼 내 방으로 들어와 곁에 머물러 주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박하다. 자신이 볼 때 부족하고 창피해 보이는 부분은 스스로에게조차 꺼내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아버린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나에게 이런 면도 있어’라고 보여주는 순간, 그리고 상대가 ‘그렇구나’ 하고 받아주는 순간, 내 마음을 편들어 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는다. 그렇게 나는 그 상처나 수치스러움을 가져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관계의 상처는 관계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신비로운 힘이 있다. 내가 봐도 못나고 추해서 숨기고픈 모습까지 이해받는 경험을 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가족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상담자가 되었든, 그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치유의 힘’을 가진 관계로 거듭나는 것이다.
나 역시 관계의 상처로 아파하고 힘들어했지만, 치유적인 관계를 경험할만한 기회가 왕왕 찾아왔다. 청소년기를 통과한 후 내 곁에는 늘 서로의 고통을 진하게 나누고 보듬는 친구들이 있어왔다. 나조차도 내가 싫어지던 밤 오랜 통화로 공감해주던 친구, 내 선택에 무조건 지지를 보내준 친구, 정리되지 않고 쏟아놓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준 친구. 그들이 지금의 나를 빚어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속마음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내 취약함을 약점 삼아 교묘하게 무시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거절의 두려움까지 감수하고 힘껏 마음을 열었던 순간,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나를 알아봐주고 이해해주는 이들을 만날수록 내 마음에서 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내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는 거절의 두려움도 점차 옅어져갔다. 관계가 포개어질수록 사람에 대한 신뢰가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 신뢰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에 대한 믿음으로 쌓여갔다.
결국 상담이 가진 힘도 그 뿌리는 관계에 있다. 때로는 어떤 좋은 상담기법을 쓰느냐보다 상담자와의 관계가 치료의 효과를 보증한다. 나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이 사람이 받아들여줄 수 있다는 단단한 신뢰가 있을 때, 의식하지 못했던 억눌렸던 감정과 무의식이 떠오른다. 안전하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통합해갈 수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나에 대한 믿음도 커질 것이다.
* 매달 5일 '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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