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별에서 만난다_교실 안의 코끼리_고운
‘밤이 더 좋아, 밤은 영혼을 별까지 닿게 해주니까!’
밤을 두려워하던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던 책인 <God, This is Anna>에서 발견한 구절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배영을 하듯 침대에 누워 있다가 주먹에 두려움이 한 움큼 쥐어질 때면, 생각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귀신같은 것이 무섭기보다는 하루동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우울한 생각이 연속적으로 떠오르면서 불면증이 생겼던 것 같다. 잠 때를 놓치면 잠은 더욱 멀어졌다. 가족 모두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에 푹 빠진 깊은 밤이면 나를 빼고 모두 어딘가로 가버렸다는 소외감에 무서움은 더 커졌던 것같다.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슬픔에 빠져 잠도 자지 못하고, 무거운 나날을 어린 어깨에 메고서 어찌할 줄 모르는 힘겨운 밤이 있었다.
그래서 교직에서 만난 아이들이 겪는 삶의 무게를 결코 어른에 비해 가볍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몸집이 조그맣다고 영혼도 조그만 건 아니다. 밤 11시에 전화를 받고 가출한 반 학생을 찾으러 달려 나간 적이 있다. 차가운 건물 계단에 웅크려 앉아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어머니와 상담해보니 가정에 문제가 있었다. 어른들이 겪는 고통에 가족 구성원인 아이들도 같이 짓눌리고는 한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떠한 한계를 넘어버리면 아이에게는 넘어가선 안 될 선도 넘어버리는 것 같다. 아픔은 터져서 공기를 타고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는 어른보다 작은 어깨로 버텨낸다.
“선생님도 사실은 어릴 때, 너와 같은 경험이 있어. 믿기지 않겠지만, 그래.”라고 지난 백 명이 넘는 제자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제자에게 비밀스럽게 이야기했다. 비슷한 경험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일기장 구석에 그 어린 것이 자살하고 싶다고 끄적거렸고, ‘왜 나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상담을 신청했기에 진심이 담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심정으로, 그 상황에서 내가 들었으면 힘이 되었을 법한 말을 전했다.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일과 실제 내가 한 행동과 말, 그리고 마음가짐과 생각들까지 알려주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릴 때 나 스스로를 굳게 믿고, 조그맣더라도 잘하는 것을 하나씩 만들어 갔었어. 그렇게 좌절 속에서도 나를 아주 조금씩 자랑스럽게 만들다 보니 강해지더라. 지금은 굉장히 행복한데,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어. 주변의 누구로 인해서 행복할 때도 있지만, 솔직히 나로 인해 행복해. 앞으로 너에게도 행복이 스며드는 날이 있을 거야. 반드시.” 말을 끝내고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통통한 분홍빛 뺨과 잘 어울리는 미소가 잠시 일렁였다. 그 순간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했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던 날, 그 아이가 노오란 귤을 교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선생님, 인생은 시큼한 귤 같대요. 따뜻하게 자주 주무르다 보면 달아지기도 한 대요. 앞으로도 힘내세요!” 그 아이가 하는 응원은 다른 누구의 응원보다도 울컥하고 힘이 났다. 적어도 내게는 힘들 때 꺼내 볼 수 있을 만큼 힘이 나는 장면이다. 교사는 영향을 주는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영향을 받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첫 발령에 담임을 맡은 4학년 반에는 몇 년 동안 따돌림을 당하며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버린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를 툭하면 불신했다. 지우개, 핸드폰 같은 것을 잃어버리면 곧바로 의심하곤 했다. 나는 왕따를 가까운 사람의 입장에서 본 적이 있기에 “우리 반에 왕따는 없다”가 교직 기본 모토였다. 교사의 낙관일지 모르겠으나, 공부는 학교가 좋아지면 그 후에 관심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교우관계가 학업의 상당 부분에 있어 방해가 되었던 경험이 있기에 생활지도를 학업보다 신경 썼다.
아이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기에 아주 은근히 아이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켰고,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 행동인지 자꾸 이야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와 꾸준히 상담했다. 처음에 학교생활이 어떠한지 물었더니 바로 두터운 눈물을 쏟았다. 같이 울었다. 상담해보니 친해지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며 친구들에게 거부감이 드는 무리수를 던지는 것이 겉도는 악순환의 하나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아이에게 방법을 알려주며 아이의 마음을 들어주었다. 몇 년간 누적된 서열과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았지만, 몇 명의 학생들은 몰래 나에게 그 친구가 힘들어하는 부분이 자기도 걸린다며 함께 걱정해주기 시작했고, 막바지에는 그 아이를 향한 폭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밤새 눈이 내려 학교 돌담에 소복이 눈이 쌓인 첫 제자들의 졸업식 날, 같이 축하해주고 돌아온 교실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꽃 옆에는 ‘감사합니다’라는 쪽지가 같이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복도로 나갔더니, 그 아이의 뒷모습이 후다닥 사라졌다. 그 아이가 머물었을 싸늘한 복도에서 따뜻하고 진한 여운이 남았다.
잠 못 이루는 우리는 밤이 되면 별에서 만난다. 어릴 적의 나도, 차가운 건물 계단에 웅크린 나의 제자도, 아픔을 가진 제자도, 생각이 많은 누군가도. 우리는 남들 다 가는 꿈나라 대신 별나라에 닿는다. 그 별에서 영혼들은 서로를 느낄 수 있기를, 그래서 부디 혼자라는 생각에 눈시울 붉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신 귤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달콤하게 슬픔을 감싸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른 하루의 시작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향해 토닥이는 손길이 때로는 과거 잠 못 자고 훌쩍이던 날 안아주는 온기가 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인생은 그렇게 지나온 길에 장미를 놓으며 향기를 남긴채 계속되는 것 아닐까.
* 글쓴이 - 고운
아이들은 이 조그만 교실 사회에서도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서며 성장한다. 그런데 유독 자꾸만 같은 곳에서 넘어져 상처가 되는데, 그곳에 엄청 커다란 코끼리가 멀뚱히 서 있다. 교실 속 코끼리를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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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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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hyun325
어찌할 줄 모르는 힘겨운 밤을 지내며 아이에서 어느덧 서른 둘이 되었네요. 저도 분명 열살이었던 그 어린 시절이었었는데. 어른이 되었는데도. 지금 아이들의 모습이 그때의 내 모습과 얼핏 겹쳐진달까. 상황은 다르지만 연민 같은게 느껴져. 공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상황은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잘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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